나의 먹이

나의 먹이 – 들개이빨, 콜라주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고, 러시아군이 밀밭에 불을 지르는 사진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밀값이 오르겠구나. 쌀값도 오르겠네. 어른 둘이라면 어떻게든 해 나가겠지만, 집에 어린아이가 있다 보니 식량난이 정말 걱정되었다. 오죽하면 야채를 말리거나 남은 밥으로 누룽지 만드는 법 같은 거라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이 책을, “먹는 존재”를 그리신 들개이빨 작가님의(어째서인지 나는 들개이빨 작가님이라고 치면서 자꾸 “들깨이빨”이라고 오타를 내곤 한다. 이 리뷰를 쓰다가도 두번 오타를 냈다.) 에세이니까 당연히 재미있을 것이다, 그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미도 재미인데, 내게는 바로 저 “식재료 갈무리하는 법”에 대한 힌트를 준 책이기도 했다.

일단 책의 앞부분은 “꿔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꿔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사실은 존잘님이고 큰 상도 받으신 작가님이지만, 성공 후에 밀려오는 가면증후군에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다 상당수의 작가들은, 백지를 주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라고 하면 흥미진진한 썰을 풀 수 있지만, 막상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버벅거리고 제대로 말을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니, 요즘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인스타그래머블한 세계에 위축되기도 쉽다.

『먹는 존재』의 성공에 내 인생의 운을 몽땅 써버린 것 같다. 이제 그보다 더 나은 물건은 못 뽑아낸다. 앞으로 나를 기다리는 유일한 이벤트는 작품 하나만 반짝 남기고 사라진 작가들의 공동묘지에 파묻히는 일뿐이다. 기쁨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절망의 산사태가 온 마음을 덮쳐버렸습니다.

이 “꿔보”라는 말은, 바로 그 인스타그램과 어울릴 법한 유명인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 여기에 자신보다 젊은 작가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내가 퇴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싶은 자기 의심 속에서, 작가님이 버텨 나가겠다고 생각하며 곱씹은 말이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말에는, 옛날옛날 역모를 저지르려고 모였던 사람들이, 구석에 놓인 보릿자루 위에 걸쳐진 갓을 보고 사람인 줄 알고 모두가 돌아보고 흠칫 놀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그 말에서 작가님은 구석일지라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리고 구석에 있는 동안 죽지 않고 버틸 것을 생각한다. 아마도 그 감정에 공감하는 사람은 저마다 조용히 어깨를 펴며 자세를 바로 했을테지. 나도 그랬다. (언젠가는 SF 어워드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라, 무대로 나아가 상을 받을 날도 올까. 아니, 꾸준히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원로작가라고 공로상이라도 받을 지도 모르지. 살아남아서 버틴다면 말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들개이빨 작가님은 나같은 이런 고민을 하실 분은 아니잖아! 아, 진짜, 잘 나가는 사람들이 더 한다고. 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

그리고 그 생존 전략 중 하나로 들개이빨 작가가 선택한 것은, 죽지 않고 버티는 것, 그러기 위해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하는 것이다. 채소, 콩, 계란, 우유, 견과류, 아보카도, 고구마, 밥과 김치, 빵, 고기, 술로 나뉜 이야기들은, 때로는 부모님이 농사지어 보내주신 채소들을 음식물 쓰레기로 만들지 않고 먹기 위한 투쟁을, 때로는 싸고 질좋은 단백질을 먹기 위한 노력을, 때로는 밀가루와 알코올의 유혹에 휩쓸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쾌락을 빻으면 밀가루가 될 겁니다.”라니, 작가님 정말 빵 사랑하시는군요 ㅠㅠㅠㅠㅠㅠ) 읽으면서 채소 저장법은 메모도 하고, 또 경기가 많이 어려워지거나 전지구적인 식량난이 왔을 때 아이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게 뭘까 고민도 하고, 과일주스에 이스트를 넣어 술을 빚는 대목에서 웃기도 하면서. (아냐, 작가님은 진지하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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