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의 “빨강머리 앤”의 위상은 크다. 근대 여성 인물인 번역가 무라오카 하나코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의 제목은 “하나코와 앤”이고, 홋카이도에서는 그린 게이블스를 재현해 놓은 공원도 있다고 한다. 지브리의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은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으며 수많은 굿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카나야기 사치코의 빨간머리 앤을 좋아합니다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앤을 좋아하지만, 이 정도의 열광은 때때로 신기하기도 하다.
그 밖에 몇년 전에 나온 책으로 빨강머리 앤 레시피북이라는 책도 있었다. 일본 책은 아니고, 빨강머리 앤에 언급되었던 요리들(앤이 망쳤던 저 유명한 “진통제 케이크”까지)이 나오기는 한데, 읽으면서 이건 과한 착즙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맛이나 묘사가 나온 것도 아닌, 스쳐 지나간 과자들에까지 레시피를 만드는 것은. 그래서 대원에서 보내준 우편물에 들어 있던 이 책을 보고 생각했다. “빨강머리 앤 레시피북”의 만화판인가 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이 책이 참조한 책은 “영구보존판 : 빨간머리 앤의 세계로”(각켄), “빨간머리 앤의 수제 그림책”(하쿠센샤), “빨간머리 앤의 요리BOOK”(북킹)이라는데,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다 보니 저 책들도 번역되어 들어온다면 읽어보고 싶어졌다. 주인공인 카스미는 앤을 좋아하는 여고생이고, 그의 돌아가신 할머니는 젊었을 때 앤을 동경하고, 언젠가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고 싶어했으며, 일본인과 결혼하여 이웃에 살던 캐나다 여성에게 바로 앤 시리즈에 나오는 요리들을 배웠다. 카스미는 할머니의 레시피 노트를 물려받아, 거기 나오는 요리들을 엄마와 함께, 혹은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 본다. 그 과정에서 카스미는 할머니의 청춘을 이해하고, 할머니의 옛 친구를 만나고, 캐나다에서 온, 예전에 이 근처에서 살았던 캐나다 여성의 손녀와 만나 할머니들의 옛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우정을 시작한다.
카스미가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났다면, 카스미의 엄마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카스미를 낳았을 테니 아마도 1970년대 중반 사람, 할머니는 20대에 엄마를 낳았다고 생각하면 아마도 1940년대 후반이나 1950년대 초반에 태어났을 것이다. 무라오카 하나코의 빨강머리 앤 번역이 일본에서 출간된 것은 1952년의 일이었으니, 할머니의 성장은 일본에 번역된 빨강머리 앤과 함께 했으리라.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좀 더 젊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은 것까지 감안하면, 어쩌면 카스미의 할머니는 빨강머리 앤이 일본에 번역되어 출간된 바로 그 해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앤을 읽으며 자라나고, 앤을 동경하던 일본의 소녀들이 어머니가 되고, 앤의 나이를 뛰어넘어 할머니가 되고, 다시 그 딸과 손녀에게도 빨강머리 앤에 대한 사랑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빨간머리 앤 뿐 아니라 텐파 오븐이나 으름덩굴로 만든 바구니, 소중하게 사용하고 대를 물려 쓰는 그릇들 같은 것에서, 앤에 대한 사랑이 일본 여성들에게는 일종의 전통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싶은 느낌도 든다.
PS) 그렇다고 다 좋은 건 아니고. 아마도 일을 하는 듯한(명확하게 직장에 다닌다고 나오진 않는다) 카스미의 엄마는 카스미가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 때는”엄마가 예전에 만들어 줬다”면서, 젊었을 때 자신의 어머니에게 요리를 맡기고 자신은 하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카스미가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감탄하거나 하는 역할로 주로 나온다. 엄마의 추억의 맛이나 할머니가 그때 엄마에게 먹여주고 싶었던 음식을 카스미가 만들어준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카스미의 남동생이 친구들을 집에 불러 공부한다고 하자 엄마는 “아들 친구들에게 너희 엄마 요리 잘한다는 말을 들어보고 싶다”며 고민한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딸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을 때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