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 : 매버릭

탑건 : 매버릭

진지하게 생각하면 걸리는 부분들이 분명 있다. 설령 적국이 UN의 허가 없이 우라늄 처리 시설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일단 미국이 공습을 해서 활주로와 우라늄 처리 시설을 부숴놓고 보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라든가. 그렇다면 이 적국은 또 어디인가. 막판에 그 나라 활주로에 F-14가 있었던 걸 보면 우방국이었을 수도 있는 나라다. (이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거진 숲이나 겨울 풍경을 보면 러시아일 수도 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렇게, 태평양 가까운 곳에 그걸 지어놓았나? 저거 영변 아니야? 하는 생각마저 좀 든다. 게다가 적국의 인종을 보면 이걸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어서인지, 적국의 군인들은 먼 발치에서 연기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고, 교전중인 파일럿들도 꽁꽁 싸매서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탑건”이 나왔던 1986년에는 그냥 소련의 지원을 받는 국가라고 떡하니 나오고, 적기로 미그기가 날아다녔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적국을 매우 모호하게 처리해 버렸다. (집에와서 확인해 보니 비행장 좌표라고 찍힌 위치도 태평양 한가운데다.) 찜찜한 미국 패권주의 프로파간다물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뭘 특정할 수 없을 만큼 짜 놓았으면 그나마 성의는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사실 영화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 겨를이 없었다. 정확히는 “탑건”의 오프닝이 반복되는 듯한, “탑건 : 매버릭”의 오프닝에서, 그리고 ‘Danger Zone’에서. 전작을 봤던 팬들에게는 이미 반쯤은 게임 끝난 이야기였다. 전투기들이 날아다니고, 이제는 50대가 된 피트 ‘매버릭’ 미첼 대령은 여전히 애비에이터 선글래스에 가죽점퍼, 여기에 가와사키 닌자 오토바이를 몰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전투기와 속도를 겨루며 달려간다. 여전히 속도광이고, 여전히 명령권자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런데다 지금은 장포대다. 장성으로 진급하기를 포기한 대령. 원래의 경력이나 그의 눈부신 전공으로는 벌써 별을 몇 개는 달았어야 할 사람이지만, 장성이 되면 지금처럼 현역 파일럿으로 날아다닐 수 없으므로 그는 승진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제독들이다. 대위일 때도 못 말릴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미국 최고의 에이스고 그의 동료들은 전부 제독들이며 그의 절친한 동료인 아이스맨은 4성장군에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다. 초반에 신형기를 무인기로 대체하려는 제독에 맞서는 장면도 항명이 아니라, “아이고, 제독님 아직 안 오셨네. ㅋㅋㅋ 일찍 일어나는 장포대가 사고를 치는 법.”처럼 보일 정도다. 그가 아직 테스트중인 기체로 원래 목적이던 마하 9를 가뿐히 넘기고, 최종 목표인 마하 10도 넘긴 상태에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하며 과속하다가 전투기를 날려먹지만 않았더라도.

마하 10으로 날다가 비상탈출을 한 것 치고는 너무나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매버릭은, 그야말로 ‘경력의 마지막’으로 탑건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곳에서 매버릭은 열두 명의 파일럿 중 여섯 명을 선발하여 적국의 우라늄 처리 시설을, 그곳에 핵물질을 넣고 본격적으로 처리를 시작하기 전에 파괴해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기술들은, 매버릭은 각각 서로 다른 실전에서 경험한 것들이지만 이 탑건 출신 파일럿들은 그렇지 않다. 매버릭은 이들을 데리고 모의전에 나서 전부 격추시켜 버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을 주문한다. 하지만 여기에 매버릭의, 35년 전의 과거가 얽힌다. 바로 전작에서 사망한 동료 구스의 아들 루스터다. 과거의 구스를 떠올리게 하는 콧수염과 피아노 솜씨, 그리고 조종사로서도 동료를 보호하며 신중하고 안정적인 그를 보며 매버릭은 흔들린다. 자신에게 날아다니는 것은 본능과도 같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나는 법을 가르칠 수도 없다. 과거 사관학교 입학원서를 네 번이나 반려시킨 일로 루스터는 자신을 원망하지만, 그건 세상 떠난 루스터의 어머니가 아들이 파일럿이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대학입시를 네 번이나 방해한 아는 삼촌이라니. 어떻게 그런 것과 화해를 하죠. 한국인으로서는 차라리 아버지의 원수와 화해를 한다면 모를까, 죽어도 화해 못할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도 매버릭은, 이 작전에 참가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루스터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계속 생각한다. 그런 그를, 앞으로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사람은 바로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전우 아이스맨이다. 그는 암이 재발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매버릭과 비교할 수도 없이 늙어보인다.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 계속 텍스트로 대화하던 그는, 매버릭에게 힘겹게 목소리로 말한다. 해군은, 그리고 그 아이는 아직 너를 필요로 한다고. 그게 내가 너를 위해 싸운 이유고, 네가 아직 해군에 남아있는 이유라고.

하지만 그 아이스맨이 세상을 떠나자, 탑건에서는 매버릭이 불가능한 훈련을 강요하고 있고, 그 바람에 작전일이 당겨졌음에도 아직도 실적이 지지부진하다고 여기며 그를 교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모두가 모여있는 사이, 매버릭은 무단으로 전투기를 발진시켜 자신이 제시한 모든 미션을, 시간을 단축해 가며 성공시킨다. 한번 “그게 된다”는 걸 직접 몸으로 보여주자, 열두 명의 조종사들은 그의 뒤를 좇기 위해 더 성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탑건에서는 최종적으로 매버릭 본인에게 출격 임무를 내리며, 그가 이 일을 함께 성공시킬 수 있는 다섯 명의 대원을 고르라고 한다.

(과거 80년대였다면 다섯 명의 대원은 전부 남성에, 어쩌면 비백인은 한두 명 정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지만, 여기서는 나름 기계적으로나마 안배라는 것을 하고 있다. 루스터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지만, 여성인 피닉스, 흑인인 페이백, 라틴계에 스타트렉 마니아인 팬보이, 여기에 너드인 밥이 들어간다. 이왕이면 너드에 도서관에 자주 가고 실력은 좋은 밥이 동양계 캐릭터였으면 좀 더 균형이 맞았을 텐데. 여성이 한 명 더 들어가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미 해군 장교 중 여군 비율은 15%. 그냥 딱 현실 비율에 맞추기만 한 것 같다.)

매버릭은 피닉스와 밥, 페이백과 팬보이를 데려가고 자신의 윙맨으로 루스터를 지목한다. 미션은 성공하지만 귀환 중 이들은 지대공 미사일의 공격을 받고, 루스터의 후면 무장이 바닥나자 매버릭은 루스터 대신 그 공격을 막아내고 추락한다. 그리고 루스터는 매버릭을 구하기 위해 돌아간다.

함께 눈밭에서 조난당한 두 사람은, 귀환하기 위해 비행기를 찾아 나선다. 그들의 항공모함이 폭격해버린 활주로 구석에는 낡디낡은 F-14가 있었고, 매버릭은 그걸 훔쳐서 이륙한다. 돌아오는 길에 적의 최신예기를 격추까지 시켜가면서. 마지막에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루스터의 라이벌이었던 행맨이 나타나 멋지게 격추시키고 그들을 구해낸다. 그야말로 동료애와 우정의 승리이자, 과거 매버릭이 아이스맨을 구해냈던 장면과도 겹친다.

수많은 전투기들의 도그파이트 만으로도 눈을 뗄 수 없지만, 전작을 보았던 관객들에게는 전작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들 때문에 더 몰입하게 된다. (집 가까운 CGV에 갔더니 영화를 보는 내내 어르신들이 몇몇 장면에서 ‘아, 저 장면’ 하며 웃으시는 것을 보았다.) 과거의 인물들이, 현재의 젊은 조종사들에 투영된다. 루스터는 겉모습도 성격도, 과거의 구스와 닮았다. 여기에 구스를 잃은 아들로서의 모습과, 구스를 잃은 뒤의 매버릭의 그늘이 같이 보이는 캐릭터다. 그는 매버릭을 닮았지만 그보다는 구스에 가깝고, 매버릭의 그늘을 안고 있다.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금발 백인 알파남인 행맨은, 그야말로 아이스맨의 재현이다. 90년대까지만 했어도 이 타입은 주인공의 라이벌이자 이야기의 2인자로 나왔을 지도 모르지만, 요즘은 그다지 그렇진 않다. 행맨은 조종 실력은 탁월하지만 자기 실력만 믿고 동료와 박자를 맞추지 않는 타입이고, 그 바람에 백업을 맡게 된다.

물론 매버릭을 닮은 캐릭터도 있다. 여성 파일럿으로 최종 멤버에 들어가는 피닉스다. 검은 머리, 작은 체구, 빨강과 검정으로 도색한 헬멧, 승부욕, 조종실력, 행맨이랑 경쟁하고 루스터와 우정을 나누며 루스터가 피아노 칠 때 마치 과거 매버릭이 구스의 피아노 옆에 서 있었던 것과 같은 구도로 서 있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매버릭은 죽은 구스를, 루스터는 죽은 아빠를 찾고 있지만, 피닉스는 자신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 밥을 부른다. 여기에 훈련 중 사고를 당하는 대목까지, 피닉스는 “구스가 죽기 전 까지의 매버릭”, 혹은 “구스가 죽지 않은 세계의 매버릭”을 상징한다. (솔직히 전작 때문에 여기서 밥이 죽을까봐 걱정했다.) 무엇보다 루스터는 무리지어 사는 생몰이지만 피닉스는…..일단 생물인지 먼저 논해야 하지만 무리는 확실히 안 지을 것 같다는 점에서 매버릭과는 이쪽이 더 같은 계열이다. 작가가 등장인물들의 콜사인을 아무렇게나 지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농담처럼 “탑건”이 게이 군단(…..)에 떨어진 경계선에 선 청년의 이야기라면, 이쪽도 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점도 있을 거고.)

만약에 21세기에 저 탑건 시리즈의 스핀오프를 낸다고 하면 누가 주인공을 맡게 될까? 행맨의 미래는 이번 편에서 모두가 보았다. 그의 미래는 아이스맨이다. 젊은 나이에 적기를 격추시키는 전공을 세운 에이스 파일럿인 그는, 이번 경험으로 팀웍의 소중함도 배웠고, 아마도 순조롭게 승진하고 제독이 될 것이며, 어쩌면 아이스맨처럼 4성장군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나면 전투기 편대가 고인이 천국으로 가셨음을 상징하는 추모비행까지 할 것이고. 어쩌면 그는 루스터가 장포대로 남거나 피닉스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유리천장 앞에서 좌절할 때 그들을 위해 손을 써 줄 지도 모르겠다.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정도의 의리는 있는 인물로 나오니까. 루스터의 이야기는 이번에 매버릭과 화해하며 해소가 되었다. 만약 이 시리즈의 인기에 힘입어서 스핀오프같은 뭔가가 나온다면 “탑건 : 피닉스”가 나온다면 매우 납득할 만 하지 않을까? 얘는 기본 셋팅이 매버릭의 젊은시절 캐릭터를 가져온 여성이고, 행맨과 루스터, 그리고 파트너인 밥와 대체 어떤 경쟁과 어떤 우정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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