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에 유행했던 “자녀교육” 서적인 타이거 마더를 참으로 뒤늦게도 읽게 된 것은, 최근 내가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그저 불안을 떨치기 위해 정말 온갖 교육방법 책들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소문도 자자하고 논란도 있었는데다 버락 오바마도 읽었다는 책이라니까 궁금해서라도 한번 읽어봐야지 했지만 관심사 밖이라서 손을 못 대고 있던 것을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이건 내 예상(엄격한 교수법의 긍정적인 측면)과는 아득히 다른 책이었다.
예상했던 것은 “자유방임주의적 미국 사회에서 동양식의 엄격한 자녀교육은 어떻게 빛을 발하는가”였다. 사실 마케팅도 신문 기사도 다 그쪽에 방점을 찍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실제로 읽은 것은 “김씨네 편의점 예일대 교수 버전”내지는 “나혼자만 스카이캐슬” 같은 거였다. 무려 미국 땅에서 20세기말 21세기 초에, 자식이 써 준 생일카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마구 핍박하며 “엄마가 네 나이였을 때는 생신을 맞으신 할머니를 위해 시를 지었어. 일찍 일어나서 집안을 청소하고 아침을 지어드렸지. 창의력을 발휘해 하루 공짜 세차권 같은 쿠폰도 만들어서 드렸고.”같은 소리를 한 끝에 “훨씬 더 멋지고 마음에 드는 생일 카드를 받았고 아직도 그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엄마라니. 사람이 수치를 모르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싶었다. 물론 순수하게 웃기는 대목도 있긴 있었다.
개를 키우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코코(사모예드)를 중국식으로 키워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숫자를 세고 응급처치를 할 줄 아는 개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데다 코코를 분양한 사람이 사모예드가 대단히 영리한 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중략) 알렉시스와 조든이 떠나자마자 나는 컴퓨터로 달려가 인터넷에서 “개 지능과 순위”를 검색했다.
이 구구절절 부조리 개그같은, 마치 미국에서 동양인 캐릭터를 인종차별적으로 놀려먹을 108가지 소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자녀교육” 분류에 꽂혀 있다니. 이쯤해서 책 뒷표지를 넘겨보자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다면 타이거 마더가 되라”는 말이 적혀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엄격한 교육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는 건 거의 위플래시에서 스승의 은혜를 느끼는 급의 착즙 아닌가….? 게다가 실제로도 위플래시같은 짓들도 한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아이가 연주하지 않는다고 “쓰레기”라고 부르거나 생일파티를 하지 않겠다거나 인형을 내다 버리겠다고 위협한다. 심지어는 아이가 다쳤는데도 피아노 연습을 시킬 궁리를 한다.
소피아가 내가 모는 자동차에 발을 치였다. (중략) 소피아는 결국 전신마취를 하고 큰 나사못을 두 개 박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내내 커다란 부츠를 신은 채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다. 그것 때문에 소피아의 기분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그 덕분에 피아노를 연습할 시간은 충분히 얻었다.
그래놓고서는 “서양에서 중국식으로 아이를 기르려면 혼자서 외로운 투쟁을 해야 한다.”고 한탄한다. “사회 전체의 가치관을 거스르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는데, 그 가치관으로 예를 든 것이 계몽사상과 세계인권선언이다. 이쯤 되면 이 사람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 본인도 교수고 교육자인데 알고 있겠지. 자기가 하는 일이 봉건적이며 반인권적인데다,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그는 딸이 학교에서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해서, 점심시간이나 체육시간, 미술시간에 딸을 학교에서 데려와 연습을 하게 한다.
룰루는 학교에서 나를 발견하는 순간 굳었고 그 애의 친구들은 나를 항상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그 당시 룰루는 열한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룰루를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며 둘째딸 룰루는 반항한다. 아기 때부터 추운 겨울에 고집을 꺾으려 집 밖으로 내쫓아도 집 밖에서 버텼던 룰루는 사춘기를 맞으며 반항하고, 마침내 폭발한다. 그는 러시아에 왔으니 캐비어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저자에게 반항하고 컵을 깨 버린다. 그동안 이 딸이 당했던 일에 비하면 그렇게 어마어마한 반항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기본적으로 모범생이니까.) 솔직히 그동안 아이를 휘두른 묘사만 봐서는 이대로 반항 안 하고 십년쯤 더 억압해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갔으면 둘중 하나는 죽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미개인, 원시인, 진부하고 수준낮다고 자식을 비난하던 저자는, 아이가 반항하자 겁을 먹는다. 그 무렵 저자의 동생이 백혈병으로 투병하며, 살아서 자기 아이 곁에 있기 위해 힘든 싸움을 겪는 것을 보던 중이었다. (사실은 입원한 동생에게 스몰토크랍시고 룰루가 말 안듣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대목도 있는데, 아아, 이 정도로 눈치가 없으니까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난 친구가 없어요.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요.’
(중략)
나는 룰루에게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물었다. 널 더 엄격하게 다뤄야 했니? 너무 풀어 준 걸까? 나쁜 영향을 미치는 아이들과 어울리도록 놔뒀어야 했던 말이야? (“내 친구들을 모욕하지 마세요.”) 나는 룰루에게 중국에서 셋째 아이를 입양할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연습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에 첼로까지 연주하는 말 잘 듣는 아이로.
다행히 룰루는 죽지 않았다. 그는 바이올린 레슨을 줄이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연습하고, 대신 테니스에 몰두한다. 그리고 테니스 코치가 룰루의 노력과 성취를 칭찬하자, 저자의 이상한 행복회로가 다시 돌기 시작한다.
중국식 선순환 모델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걸까? 그동안 내가 룰루를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걸까? 테니스는 대단히 훌륭한 운동이다. 볼링과는 다르다. 마이클 창도 테니스를 했다. 나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테니스 협회의 규칙과 절차, 전국 순위 시스템을 숙지하고 나서 테니스 코치를 알아보고 전국의 최고 테니스 학원들을 수소문했다.
둘째딸은 드러내놓고 폭발했지만, 첫째딸인 소피아도 상태가 불안정해 보인다. 그는 저자가 피아노 연습을 강요할 때 마다 몰래 피아노 건반을 이로 갉았다. 콩쿠르에 제출할 CD를 녹음하면서도 엄마 앞에서는 몇 번이나 실수를 한다. 녹음실 기술자가 코코아를 사다달라며 저자를 내보내자, 소피아는 그제야 완벽한 연주에 성공한다. 그럼에도 에이미 추아는 이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래도 우리 애들은 잘 컸고 우리 가족은 여전히 서로 사랑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몇 번이나 강조하고 반복하는 이 말이 제일 소름돋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상황에서 그럴리가?”싶은 어떤 말을 진실이라며 강조하고 반복한다는 것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그걸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사실은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기어올라왔다. 물론 과거의 내 가족들은 자식에게 아낌없이 투자를 하기보다는 딸을 매우 가성비있게(……) 키우는 쪽이긴 했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당신들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할 때 마다 “우리는 딸 아들 차별해서 키우지 않았고 우리가족은 늘 행복한데 너만 문제다”라고 말하던 과거의 내 가족들 생각이 나서. 숨이 막혔다.
여튼 읽는 내내 참, 수치심도 없이 이런 걸 잘도 썼구만, 하고 생각했는데 읽고 나서 찾아보니, 에이미 추아가 각종 성추문이 쏟아져 나오는 브랫 캐버노 연방 대법관을 “캐버노는 여성들의 멘토”라며 포장하고 칭송하는 칼럼을 쓰고 몇달 지나지 않아 소피아가 캐버노 대법관의 로클러크(재판 연구관)으로 채용된 기사가 나온다. 그의 남편인 제드 러펜벨드는 추리 작가이자 헌법학자이고 예일대 법학 교수이지만 성추행 혐의로 정직당했다. 읽으면서 느낀 셰임리스와 현실이 겹쳐져서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수치심이라고는 없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자들에게서 대체 뭘 배워야 할지.
이 철면피같은 책에서 에이미 추아를 이해할 만한 대목은 딱 하나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을 때, 나는 갑자기 마비 상태에 빠져 버렸다. 나는 한 번도 연주자로서 무대에 서 본 적이 없었다. (중략) 소피아가 웅장하고 어두운 강당 안에서 자그마한 몸으로 용감하게 피아노 앞에 앉아 그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가슴 속으로 밀려왔다.
그는 자기 딸을 부러워하고 있었던 걸까. 이민 1세대인 자신의 부모가 2세대인 자신에게 충분히 다 채워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신에게 아낌없이 지원받고 있는 자기 딸을. 여튼 이 사람은 그럼에도 자신은 옳다고 믿는다. 자신이 딸을 위해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딸은 더 주목받아야 하고 더 어려운 것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프로코피예프는 전혀 어렵지 않아 보였고, 대회 우승자가 연주할 곡 같지도 않았다. 게다가 하필 왜 프로코피예프야? 내가 프로코피예프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피터와 늑대’ 뿐이었다. 라흐마니노프처럼 어려운 걸 놔두고 왜?
그리고 그런 요구를 하는 자신은 정당하며, 중국식으로 자식을 기르지만, 다른 동양계 부모들과는 처지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딸들의 연습에 간섭하는 장면만 보고 있어도, 그가 음악을 쥐뿔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겠는데 말이다.
대기실에는 동양계 부모들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굳은 얼굴로 왔다갔다 하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 뿐이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 저들이 과연 음악을 사랑하기나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곳에 있는 부모들은 거의 모두 외국인이거나 이민자라는 것, 음악은 그들에게 통행권이나 다름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저들과 달라. 처지가 다르니까.
어쨌든 그런, 사랑에 대한 잘못된 믿음이, 자식에 대한 질투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자식을 괴롭힐 정당한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끔찍한 점은, 이 책이 나온 뒤 한국에서의 반응이었다. 에이미 추아는 “한국으로의 여행은 내가 책을 낸 뒤 했던 여행 중 가장 좋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많은 오해를 받았다. 바이올린 연습을 하루 3시간 시키는 게 아동학대가 아니냐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한국에 갔을 때 그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세 시간? 그건 아무것도 아니죠”라고 응답해줬다.”라는데, 그냥 한국이 아직도 뿌리깊은 아동학대 국가라는 증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