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

키르케 – 매들린 밀러, 이은선, 이봄

키르케의 이야기는 주로 마녀, 노파, 혹은 오디세우스를 유혹하고 그의 부하들을 돼지로 만들어 그가 이타카로 돌아가는 것을 방해했던 여신의 이야기로 묘사된다. 주로 오딧세우스와 관련해 짧게 다루어지던 키르케, 서양 문학에 등장한 최초의 마녀이자 원형인 키르케의 이야기는 매들린 밀러에 의해, 남성에게 선택받는 “신부”가 아니라 자기만의 방과 같은 무인도 아이아이에에서 홀로 살아가는 자주적이고 지혜로운 여성, 나아가 신으로서의 삶에서 유한하고 생명력 넘치는 인간의 삶을 선택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님프라는 단어에서 우리 미래의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언어로 님프라는 말에는 그냥 여신만이 아니라 신부라는 뜻도 담겨 있었다.

티탄 신족의 태양신 헬리오스의 사촌인 오케아노스의 수많은 딸들(나이아스) 중 한 명이었지만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는 어머니 페르세이스는, 자신과 같은 흔한 존재가 힘을 얻으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낳아 줄 것을 청하는 헬리오스에게 결혼을 요구하고, 키르케와 페르세스, 파시파에, 아이에테스를 낳는다. 하지만 다른 세 형제와 달리 키르케는 못생기고 약삭빠르지 못했으며, 가족들에게서 소외당한다. 그런 키르케의 유년 시절, 그의 숙부들 중 하나인 프로메테우스의 처벌은 키르케의 유년에서 중요한 사건이 된다. 프로메테우스를 고문한 뒤 연회를 벌이는 신들 사이에서 키르케는 프로메테우스에게 넥타르를 가져다 주고, 프로메테우스가 자기 자신의 영원한 삶을 내어 준 존재인 유한한 수명을 가진 인간들에 대해 듣게 된다. 그것은 키르케가 처음으로, 자신이 생명을 갖고 있음을 자각하는 계기였다.

파시파에는 제우스의 아들이지만 인간인 미노스 왕과 결혼한다. 페르세스와 아이에테스는 왕이 된다. 누구에게도 청혼받지 못한 키르케는 인간이자 어부인 글라우코스를 사랑하게 되고, 신의 피가 흐른 곳에서 피어나는 파르마콘 꽃의 힘으로 그를 신으로 만들어주려 한다. 하지만 신이 된 글라우코스는 키르케를 대신 아름다운 님프 스킬라를 원하고, 키르케는 스킬라를 괴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들 사남매가 최초의 마법사들로, 신의 능력이 아닌 자연에서 온 능력, 파르마케이아를 부릴 수 있는 이들임이 알려진다. 어머니인 페르세는 이 마법을 지닌 티탄 신족 아이들을 백 명은 더 낳아 세상을 지배할 꿈을 꾸지만, 그들의 힘을 경계한 제우스는 페르세가 헬리오스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는 것을 금지하고, 일족을 변신시킨 키르케를 추방한다.

천 년동안 가족들과의 사이에서 혼자 동떨어져 살아온 키르케는 이제 자연이 풍요로운 아이아이에 섬에서 혼자 살아간다. 신들은 다른 누군가가 없는 곳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벌이라고 생각하지만, 키르케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다 키르케의 추방은 티탄 신족과 올림푸스 신족의 알력의 결과였다보니, 헬리오스는 과거 티탄 신족이 제우스에게 패했을 때 자신이 제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티탄 신족의 피가 흘렀던 이 섬을 골라 키르케가 혼자이지만 왕처럼 살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무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신들의 세계에서 계절이 바뀌고 삶과 죽음이 이어지는 생명의 세계로 온 키르케는 아주 소소한 소망들(산딸기, 꽃피우기, 불꽃들의 색깔 바꾸기)과 혼자 꾸려나가야 하는 생활 속에서 자신만의 마법을 찾아가고, 동물들을 길들이고 저주를 푸는 꽃인 “몰리”를 찾아낸다.

신들 사이에서 살아가던 키르케는 조바심으로 사랑에 빠졌지만 그 사랑에 배신당했다. 혼자서 살아가고 자신을 들여다본 다음에야 키르케는 자신의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여러 남성들을 만나게 된다. 헤르메스는 때때로 놀러와 바깥 세계의 일들을 전해주며 때로는 감시하고, 때로는 오라비처럼 군다. 어떤 인간보다도 뛰어나지만 파시파에에게 아들을 인질로 잡혀 있는 다이달로스는 발명도 마법도 외로운 일이며, 자신이 괴물을 만들었다는 감각을 안다는 점에서 키르케와 서로 이해하고 교감한다. 키르케는 그에게 받은 베틀과 함께 아이아이에 섬으로 돌아오며, 생각한다.

“고독한 삶을 살다보면 별들이 일 년에 하루 땅을 스치고 지나가듯 아주 간혹 누군가의 영혼이 내 옆으로 지는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별자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늘며 아이아이에 섬을 지나다가, 혼자 사는 부유한 여자를 죽이거나 겁탈할 생각을 하는 인간 남성들을 돼지들로 변신시키며 지내던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임신한다. 키르케는 아이를 통해 과거 다이달로스가 아들 때문에 떠나지 못했던 것을, 가장 소중하고 지켜야 할 무언가가 생겼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인질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키르케의 사랑은, 그 자체로 그의 성장을 보여준다. 그는 동경하지만 배신당하고 그로 인해 화풀이를 하는 유치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여러 형태의 사랑들을 경험하고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키르케는 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섬을 떠나려 하자, 아들의 모험을 위해 트리톤과 맞서 삼지창을 얻어낸다. 그것은 키르케가 신과 맞서 전설적인 무기를 손에 넣을 만큼 강해졌으며, 작은 님프에서 신과 동등한 위치로 올라섰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테네 여신마저 물리칠 수 있을 그 무기는, “과거의 영웅이었고 지금은 타락한” 오디세우스의 목숨을 빼앗고 만다.

키르케와 여성들의 관계도 흥미롭다. 그는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 딸이었고, 연인을 빼앗기고는 그 경쟁자를 괴물로 변신시켰다. 여동생인 파시파에에게 무시당하고 그를 미워했지만, 사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될 수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신들은 문제를 일으킨 딸들을 키르케의 섬에 유배보냈고, 그들은 키르케에게 방해만 될 뿐이었다. 오디세우스를 사이에 둔 “연적”에 해당하는 아테나 여신은 키르케의 아들을 끝내 빼앗아간다. 그런 키르케가 여성에 대해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인물은 바로, 조카인 아리아드네다. 그리고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본처”인 페넬로페를 통해, 그 긴 세월 속에서 처음으로 “친구”이자 자신의 길을 잇는 또다른 마녀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천 세대를 살아온 여신인 키르케는, 이제 누군가의 동정이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마녀로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고, 수많은 유한한 이들을 떠나보냈다. 자신의 아들마저도. 그렇게 자유로워진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는 섬을 페넬로페에게 맡겨놓고 자신이 마법을 써서 괴물로 만들었던 스킬라를 찾아간다. 마무리해야 할 일들을 매듭지은 뒤, 처음에 자신이 사랑한 인간을 신으로 변신시켰던 키르케는 마치 그때와 같이, 이제는 인간으로서 텔레마코스와 함께 살아갈 결심을 한다. 완전한 성장을 넘어선 뒤, 그는 이제 유한한 생명 속에서 다시 춤추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갈 것이다.

+ 키르케의 가장 큰 위협이자 라이벌이 되는 아테나가 처음 태어날 때 부터 완벽하게 무장한 상태로, 아비에게 삼켜진 어머니 메티스를 알지 못한 채 제우스의 머리를 뚫고 나온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키르케와 아테나의 관계가 조금 더 흥미로워진다. 올림푸스의 지혜의 여신과 신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지혜를 손에 넣은 최초의 마녀, 처음부터 완벽한 존재로 태어난 여신과 천 세대의 시간동안 성장한 여신, 아버지의 딸과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딸이라든가. 둘의 관계는 오디세우스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지만, 사실 오디세우스를 빼고서도 둘만으로도 한 쌍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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