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한달이었다. 왜 한달이냐 하면 취학통지서를 받고 대략 한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취학통지서가 집에 왔다며 배우자가 사진을 찍어 보낸 날, 나는 당직을 서다가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졌다. 아니 저 메밀베게만하던 우리애가 취학통지서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내가 학부모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하지만 현실이었고 애는 취학통지서를 받더니 전에는 사다놓고 설렁설렁 한주에 한두쪽 풀면 용하다 싶던 펭수(…..EBS 만점왕 수학 유치원용)를 매일매일 풀기 시작했다. 나는 혼란에 빠졌고 한달동안 약 10권 정도의 초등학교 입학 관련 책들을 읽었다. 책은 늘 그랬지만 마약같았다. 읽는 동안에는 안심이 되지만 읽고 돌아서면 새로운 불안이 나타났다. 결국은 애가 학교에 가야 멈출 불안임을 알면서도 그랬다.
점심시간마다 회사 근처 서점에 가서 요즘은 문제집이 뭐가 있나 / 아니 동아전과 표준전과 그런건 이제 없는건가!!!! / 다달학습 이달학습 완전학습도 아주 사라졌구나. 학년별 매달 문제집은 베이비붐으로 아이들이 아주 많을 때 가능한 거였구나. / 펭수도 어피치도 공부는 안 할 것 같은데, 예전에는 문제집 표지에 공부 잘할 것 같이 생긴 재미없는 애들이 실려 있었는데 요즘은 트렌드가 바뀌었나? 등등 온갖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남들은 대체 학교 보내기 전에 어디까지 공부를 시키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애는 그냥 책만 들이 읽고, 펭수 수학 문제집이나 꼬물꼬물 풀고 있는데. 아아, 지난 봄에 우리 애 친구 엄마가 내게 “학원에 안 보낸다고요? 애한테 너무 신경 안 쓰는 것 아니에요?”하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학교 가면 파워화장! 파워정장! 파워가방!으로 파워한 착장을 갖추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아이들을 키워 학교에 보내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셨다. 아니 잠깐만요 우리집에는 일단 가방이라면 14~15인치 노트북이 들어가는 (그 중 둘은 샘소나이트 책가방, 하나는 옆가방)가방 3개와 결혼식 갈 때 들고가는 핸드폰이랑 축의금 봉투만 들어가는 가방 정도인데요. 중간이 없는데요. 아 설마 농담이겠지 저분들은 벌써 10년 15년 전에 아이들을 초등학교에 보내신 분들이잖아 요즘은 다르겠지 하고 네이버에 검색을 했다. 인스트에도 검색을 했다. 학부모 옷차림 관련해서 뭐가 잔뜩 나왔다. 비명을 질렀다. 아악. 시간은 하루하루 잘 흘러갔고, 살면서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파는 조금 비싼 가방”을 하나 질러 봐야 하나, 그럼 대체 어느정도 선에서 지르면 학교에 들고 가기 무난하다는 건가. 같은 쓸데없는 고민까지 했다.
그리고 마더메리 컴즈투미 스피킹 워즈 오브 위즈덤. 하나는 트위터 하시는 학교 선생님들의 말씀이었다. 학교 갈 때 학부모가 뭐 입었는지 선생님들은 바빠서(!!!!) 기억 못한다고. 아, 그러면 OK. 평소 회사갈 때 착장 그대로 가면 될 것 같았다. “월요일 출근용”으로 입고 가방은 책가방 메고 가기로.
또 하나는 교육에 관심 많은 지역에 사시는 지인분의 경험담. 그런 옷차림이나, 선행이나, 학습 관련 책을 수준 맞춰 구입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포함해서, 사교육을 주도하는 학부모들과 어울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여서 메모를 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나는 과연 그런 걸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가? 아니었다. 에비. 있으면 마음속으로 소금을 뿌리고 싶을 것 같은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런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그 말씀을 듣고, 산뜻하게 신경을 끌 수 있었다.
마지막은 선행학습에 대한 우리 직장상사님의 말씀이셨다. “선행학습을 시키고 싶어도 아이가 못 따라가면 선행이 되지 않는다. 선행을 안 시키려 해도 열심히 하는 아이는 혼자서 1, 2년 앞질러 간다. 선행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라 아이가 하는 것이다.” 과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 나도 집에서 학원같은 데는 보내주지 않았지만, 중학교 2학년 겨울에 비슷한 성적대의 친구들이 학원에서 고등학교 것 배우기 시작한다는 말 듣고서 정석을 하나 사다가 꼬물꼬물 풀기 시작했었다. 혹시 애가 그렇게 알아서 다음 것을 찾게 되면, 그때 선행을 시키면 되는 거겠거니 하고 알아들었다.
여튼 그래서, 나는 혼란에 빠진 채로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를 외치는 동안, 아이는 유치원 친구들과 태권도장 친구들과 함께 학교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소집일날 아침, 아이는 자발적으로 일찍 일어나 혼자서 머리감고 샤워하고(머리 감고 나서 헹구는 것만 도와주고 있다. 몸은 혼자 다 씻음) 유치원에 갔다. 그날 오후, 시간 맞춰서 유치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와 학교에 갔다. 비슷한 시간에 근처에 비슷비슷한 회사 다니는 엄마들이 나와 비슷비슷한 출근복+출근가방 차림, 혹은 비슷한 차림에 가방만 좀 좋은 것을 든 차림으로 나타났다. 아이들끼리 친하다보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떼 지어 학교로 갔다. 학교 근처에서는 또 다른 친구들도 만났다. 몇 분은 경조사 착장으로 힘줘서 입고 오셨고 추리닝 차림에 오신 분들도 있었지만 정말로 선생님들은 전혀 네버 1도 요만큼도 신경쓰시지 않았다.
다만 다음에 누군가가 내게 소집일에 뭐 준비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취학통지서는 구겨지지 않게 종이 넣는 L 폴더에 넣어 가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가방에 넣고 다니느라 L폴더에 넣어서 가져갔는데 그게 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