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씨름

하늘 씨름 – 손지상, 우주라이크소설

씨름을 진지하게 좋아하고 피지컬 면에서도 타고났지만 교포 출신으로 씨름부가 없는 학교에 다니고 있어 제도권과 시스템 안에서 훈련받지 못한 주인공은, 같은 나이에 자신보다 키가 크고 체격도 좋은 노이도를 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노이도는 잘생기고 근육도 훌륭한 자신의 인기를 위해 씨름을 이용하고 있지만, 또래 중에서는 당할 사람이 없는 챔피언이다. 그런 노이도에게 패하고 울분을 토하던 주인공에게, 주인공보다 체구가 작은 체육관 관리인 아저씨가 다가온다.

평범한 아저씨가 사실은 고수이고, 재능을 타고났지만 제도권에 들어가지 못한 청소년을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야부키 죠와 애꾸눈 탄게 관장, 스바루와 히비노 선생을 연상하게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처절하지 않고 산뜻하게 통쾌하다. 아저씨는 주인공에게 몸을 쓰는 방식부터 기본기를 훈련시키는 한편, 노이도에게 맞설 수 있는 상꼭지 기술을 전수한다. 독자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씨름 기술들이지만, 작가는 기술을 구현하는 방법을 세세히 묘사하는 대신, 이런 느낌이다 하는 것을 간결하게 전달하며 독자를 씨름판 위로 끌어들인다.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야 지지 않는다는 아저씨의 말씀과, 자신의 인기를 위해, 그리고 승리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겁한 짓을 하며, 나중에는 범죄까지 교사하는 노이도의 음침한 비밀은 대조적이다. 주인공 앞에 놓인 이 두 가지 길은 승부에 집착하느냐, 씨름 자체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승리를 앞에 두고, 언제 노이도의 약물에 당할 지 몰라 두려워하던 주인공은, 노이도가 먹인 데이트폭력 약물 때문에 그야말로 무념무상, 아무런 잡념도 없는 공(空)의 마음으로 마지막 판에서 노이도에게 상꼭지 기술을 건다. 그리고 선이, 씨름을 사랑하는 마음이 승리한다.

손지상 작가의 씨름 사랑은 유명하다. 그래서 이 단편이 나왔을 때는 놀라지 않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것은 노이도의 속임수에 걸려 데이트폭력 약물을 한 모금 마신 주인공의 위기가, 아저씨가 강조하던 하늘처럼 자유로운 마음, 얽매이지 않는 마음, 무념무상이 빚어내는 승리로 이어지는 전개였다. 수행과 명상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경지들은, 때때로 향정신성 약물이 가져오는 경지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를테면 일부 영성가들이 LSD를 경험하고, 과거와 미래가 사라지고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우주와 하나되는 경험을 했더라고 증언하는 것 처럼. 물론 약물로 만들어낸 쿤달리니 각성과 유사한 상황은, 계속되면 중독되고 사람을 망가뜨린다. 약물로 근육을 키우고, 약물로 주인공을 해치려 한 노이도의 몰락과도 같다. 하지만 아마도 주인공은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약물로 만들어진) 그 무념무상이 자신의 한계를 넘게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더 좋은 선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의 이 경험은 자신이 장차 이룩할 어떤 단계의 베타 테스트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건 씨름의 이야기이자, 사실은 인위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초월한 경험을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 수단이 약물이 될 수도 있고, SF적으로는 다른 여러 방식을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방식의 적법성을 떠나서, 그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도 작가의 영역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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