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후하가

태후하가 – mouloud(포스타입 연재작)

한 소녀가 있다. 해성왕의 딸인 귀한 신분이었지만, 나라가 망하고 유민이 되었다가, 왕부의 하녀로 들어간 여자아이. 그는 곧 왕야에게 겁탈당하고 임신을 하고, 배가 부른 채로 혼례를 올리고 왕부의 빈이 된다.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아이를 부여잡고 미쳐버리는가 싶었던 그는, 저보다 나이 많은 명원군주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장사를 치른다. “태후하가”는 그렇게, 시작부터 한으로 가득한 한 여성의 인생을 치열하게 그려낸다. 남편은 황제가 되고, 남편에게 강간당해 임신한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권력을 나눌 외척이 없다는 이유로 황후가 되지만, 아들의 위로는 여러 배다른 형제들이 있어 어린 아들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급급하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원수와도 같은 남편, 장명황제를 제 손으로 죽인 그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올리고, 아들에게 물려준 나라를 반석에 올리기 위해 때로는 자신과 적대하는 이들과도 손을 잡고, 때로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장명황제에 대한 충의를 증명하며, 정치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는 지혜와 담대한 계책으로 다섯 해 동안 태후로서 군림한다.

이렇게 요약한다면, 이 이야기는 한이 맺힌 태후가 어떻게 권력을 휘두르는지, 어떻게 내명부를 휘어잡는지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일 것이다.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남들은 왕야의 비빈으로, 혹은 새 황제의 황후로서 화려하게 살았다 기억하겠지만 스스로는 오욕의 시간이라 여겼던 그 세월을 아들에게 의지하며 버텨낸 어머니가, 아들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질투와 집착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 유사녕을 관통하는 단어는 “사랑”이다.

한참 읽는 동안에도 유사녕이 “사랑”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것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을 수도 있다. 유사녕은 결코 온화하고 자비로운 인물이 아니다. 아들의 제위를 반석에 올리기 위해 감히 역모를 저지른 황손들을 잡아 죽이고,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는 신하들을 손 안의 공깃돌처럼 제 멋대로 다룬다. 강족의 천하에서 화족 출신으로 섭정 태후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강족과 화족의 갈등 역시 사녕에게는 종종 도구가 된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도 괴물로 만들고 말 치열한 권력 투쟁의 한복판에서, 사녕을 여전히 사람으로 살게 한 것은 바로 사랑이다.

예전에 첫 아이를 잃고 실성했다는 소문마저 돌았던 사녕은, 왕야의 동생, 어린 시동생인 윤을 목숨을 걸고 보호했다. 그 사랑은 돌고 돌아,가엾은 어린 시동생에게 베풀었던 애정은 사녕을 지탱하고 사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헌신적이고 때로는 맹목적인 애정으로 돌아온다.

사녕의 또 하나의 사랑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고통으로 잉태한 아들이었지만, 사녕은 아들을 눈물과 사랑으로 키웠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은 아들이 그 아비처럼 여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내가 되지 않도록, 제 황후에게 충실하고,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키워낸 아드님은 자신과 어머니를 구하러 왔던 “영원 숙부”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5년동안 자신의 섭정으로 함께 정사를 살폈던 두 사람을 보며, 그 뿌리깊은 연모를 짐작하고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가장 가까이에서 사녕의 고통을 다 지켜보며 모셨던 연리의 이야기, 재상을 지낸 제 씨 가문 삼대와, 사녕을 성심으로 섬기면서도 제 아비의 죄를 알지 못했던 유능하고 눈치없는 정경, 매력적인 인물들이 얽혀드는 이 긴 이야기는, 결국 맨 처음에 내걸었던 제목으로 수렴하지만 그 결말까지의 길은 무척이나 험난하기 그지없다. 병약한 몸으로 정사를 돌보느라 스스로 목숨을 깎아가는 사녕의 고초를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영원왕 윤을 죽여 부장품으로 묻어주는 게 해피엔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고통스럽더라도, 때로는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오는게 아닌가 싶더라도, 한 줄 한 줄 놓치지 않고 읽기를 권한다. 앞에서 슬그머니 다루었던 조정의 이야기는, 마치 톱니바퀴가 맞아들어가듯 뒷이야기의 방아쇠가 된다. 몇 달동안 매일 숨죽이며 기다렸던 이 이야기가, 하루빨리 책으로 묶여 나온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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