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끝에 손에 넣은 영광의 절정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사람이 있다. 운명의 힘, 혹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간 “회귀자”인 그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알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그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인내하며 살아간다.
한편 현대에서 사회 초년생으로 일하던 편집자가 있다. 작가님이 갑자기 사라진 상황에서 19금 로맨스 원고를 끌어안고 늦게까지 일하던 그는,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꾸벅 졸았다가 그만 자신이 편집하던 책 속의 세계로 떨어지는 “책빙의자”가 되어 버린다. 하렘에서 며느리로 살아남는 법은, 바로 이 회귀자와 책빙의자의 이야기다.
사회초년생 편집자 하시아는 바로 이 아랍풍의 19금 로맨스에 떨어진다. 셀림 황태자와 약혼했지만 하킴 황자에게 납치당해 그의 “황금 새장”에서 희롱당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공주 아나이스가 주인공인 로맨스에서, 시아가 빙의한 인물은 바로 그 공주의 이복 자매이자 초반에 살해당하는 아스파시아다. 하지만 원래 하킴이 수녀원에 불을 지르고 공주를 납치하기로 되어 있던 밤, 황태자 셀림 라시드가 나타나 하킴의 부하들을 해치우고, 아나이스가 죽게 내버려 둔 뒤 아스파시아를 구해낸다. 아스파시아는 죽은 아나이스 대신 황태자비로서 하렘에 들어간다. 초반부터 다르게 돌아가는 세계, 셀림 라시드의 곁에는 대신관 가문의 아들이자 마법사인 사피 유누스라는, 원작에 없던 인물이 있었다. 이후 벌어지는 일들은 퍽 유쾌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얇은 베일과 노출이 많은 옷차림이 기본일 것 같았던 하렘은, 술탄의 현재 유일한 정실인 아이샤 술타나를 그야말로 회장님으로 모시는, 여자들만의 회사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야말로 황태자가 “외국의 공주에게 청혼까지 하여 모셔온 정실”인 시아는 낙하산 신입처럼 이 조직에 자리를 잡는다. 한국에서 매일 쪼이는 신입사원으로 살던 시아에게, 하렘은 크게 낯설지 않은 세계였다. 때때로 여기저기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만 빼면.
셀림 라시드 황태자는 현 술탄의 또 다른 정실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셰리페 술타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아이샤 술타나에게는 원작에서 아나이스를 납치했던 하킴 황자와 오빠와는 다르게 총명한 파티마 황녀가 있었다. 과거 명문 칼둔 가문의 딸로 술타나 자리를 약속받았던 아이샤는, 현 술탄이 황자 시절 아테네의 공주인 셰리페와 혼인하고 돌아와 자신이 두 번째가 된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자신의 아들을 차기 술탄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능하고 놀기 좋아하는 하킴은, 어머니는 스스로 술탄이 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술탄과 결혼했고, 스스로 술탄이 될 수 없어서 아들인 자신을 낳아 애지중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받지만 어머니를 증오한다. 어머니를 닮아 총명한 파티마 황녀는 하킴이 술탄이 되는 것이 어머니는 물론 외가인 칼둔 가문의 운명까지 바꿀 일이라는 것을 알고, 라시드를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백성들을 위해서는 라시드가 술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파티마와 시아는 “하렘의 여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교본을 만들겠다”는 목적을 두고 친구이자 동지가 된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 시아와 파티마, 아버지가 어머니를 내치고 측실을 왕비로 삼는 과정에서 버려진 딸(시아)과 어머니에게서 “너를 낳느라 아들을 낳을 태가 망가졌다”는 말을 들은 딸(파티마)이 손을 잡고, 술탄을 모시기 위해 모인 여자들이 가득한 하렘이라는, 가장 여성혐오적인 공간에서 연대하고 여자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마침내 반역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서로를 구하고 여자들을 구한다. 그리고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 때, 원작에 없었던 인물인 사피 유누스가 말한다. 이제 와이파이가 잘 터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그의 존재는 중간중간 단서가 나오지만 반전이라면 반전일 수 있겠다.)
무척 괜찮은 이야기인데 본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로맨스보다는 하렘에서의 투쟁과 연대 이야기가 많아서일 수도 있겟지만, 사실 메인 커플인 시아와 라시드보다는, 서브 커플인 파티마와 아레나(술탄께 바쳐진 외국의 공주 출신으로 학식이 뛰어나 파티마의 가정교사가 되었다)의 사랑 이야기 쪽이 볼 만 하다. 똑똑한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이샤 술타나가 시아를 바로 죽이지 않고 마치 잡은 생쥐를 이리저리 굴리며 노는 고양이처럼 살려두고 놀리는 것 처럼, 이 하렘에서 똑똑한 여자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머리를 쓰며 살아남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좋다. 아, 마리 클레르만 빼고.
파티마 황녀가 제일 좋았다. 파티마 황녀가 주인공인 이야기가 있으면 더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