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무척 많을 것이고, 오늘은 개봉 첫날이니까, 일단은 스포일러를 숨기기 위해 보고 나서 바로 느낀 이야기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내용을 미리 알고 싶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이 페이지에서 나갈 것.
일단 처음 보면서, 다 좋은데 몇 가지가 무척 고통스러웠다.
첫 번째로 구두 신은 채 침대에서 잠든 안나 말이다. (…..)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내면의 토종 한국인이 갑자기 눈을 떠서 고통스러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공연히 “미국인들이란.”하고 제작진에 대한 성토의 욕구가 치솟을 정도였다. 그 다음으로 고통스러운 건 아이섀도 안 지우고 주무시는 엘사였는데, 사실 화장은 뭐 하루이틀 안 지워도 피부만 답답하지, 심해봤자 피부만 상하고 마는 일이지. 하지만 눈화장을 안 지우고 자면 다음날 눈이 침침하다. 정말 눈화장은 눈 건강에 나쁘다는 게 느껴질 정도의 일이라서 사실 난 잘 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눈화장 안 지우고 그냥 자는 엘사를 보자 마음 한 구석에서 “눈이 구백냥인데….!”하는 고통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와 함께 봤기 때문에 더빙판을 봤는데, 아렌델의 “여왕” 엘사가 어째서, 동생의 남편도 아니고 동생의 남친에 불과한 크리스토프에게 존대를 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헛소리는 여기까지. 이 이야기는 여성 영웅이 자신의 근원을 되찾는 여행이다.
흔히 소년 영웅이 자신의 사명을 부여받고 현자의 지혜를 빌어 모험을 떠나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을 여러 판타지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서 엘사의 여정 역시 그러하다. 전작에서 엘사는 자신의 힘을 숨기다가 폭주하고, 실제로 “전형적인 왕자”의 역할을 대신하며 영웅으로서 언니를 구하는 것은 안나였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 엘사는 마침내 영웅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한다. 엘사는 여전히 자신의 힘에 확신을 갖지 못했는데, 트롤의 표현에 의하면 “너무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즉 이것은, 엘사가 그저 일상 생활만을 영위하기에는 과도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어서 생기는 불안이다. 평화롭지만 여기는 맞지 않는 옷이다.
수확제를 마친 평화로운 아렌델에 재해가 일어난다. 물과 바람과 불의 정령이 분노하는 것을 보고 엘사는 사람들을 피신시키고, 아렌델은 지진에 휘말린다. 아렌델을 구하기 위해 엘사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자신의 사명을 부여받음)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노덜드라의 숲(숨겨진 과거 : 안나와 엘사의 조부 때, 국왕은 노덜드라에 큰 댐을 지어주었지만 어째서인지 싸움이 벌어져 죽고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정령들이 분노하여 노덜드라의 숲은 안개로 둘러싸인 결계에 갇히고 말았다.)과 어머니의 자장가에서 언급되는 비밀의 강(현자의 지혜와 경고 : 혼자서 너무 깊이 들어가선 안 된다.)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엘사는 장난꾸러기인 바람의 정령과 어울리고, 불의 정령에 맞서 이겨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고, 땅의 정령(바위 거인)에 두려움을 느낀다. 엘사는 노덜드라의 허니마린이 어머니의 스카프 무늬를 알아본 것에서 힌트를 얻어 자신의 외연적 근원(어머니의 출신)을 마주하고, 결계 안에서도 30년이 넘게 계속되었던 노덜드라와 아렌델의 대립을 중지시킨다. 허니마린은 스카프 무늬에서, 4대 원소 말고도 인간과 정령 사이의 다리가 되는 또 하나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엘사는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다시 북쪽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엘사는 전편에서 침몰한 아렌델 국왕 부부의 배를 발견하고, 이곳에 남겨진 국왕 부부의 기억에서 두 사람이 자신의 마법의 근원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엘사의 힘은 다시 “부모를 죽인 저주받은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안나가 말한다. 적국의 왕자이지만 구하려 했던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선물”로 엘사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거라고. (“선물”은 주어진 gifted 재능일 수도 있지만, Being gay is a gift from God 이라는 동성애자 인권운동 쪽의 슬로건을 연상하게도 한다.) 엘사의 마법에 대해, 힘이자 마법 그 자체이든, 혹은 퀴어의 은유이든, 이것이 엘사에게 주어진 힘이고 재능이며 자연의 선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안나는 엘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비밀의 강이 있는 아토할란으로 가려 하지만, 엘사는 안나를 돌려보낸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위험하기 때문이지만, 사실 이것은 “동생/가족으로부터의 분리”이자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물을 건넌다는 것은 죽음과 재생의 은유이기도 하며, 바다(la mer)는 프랑스어로 “어머니(la mère)”와 발음이 같다. 엘사는 목숨을 걸고 바다에 뛰어들고, 이곳에서 물의 정령…. 이라기보다는 요정 설화 속 water horse와 조우한다. (스칸디나비아와 스코틀랜드, 영국 쪽의 전설에 이런 말 형태의 물귀신이나 물의 요정이 나온다) 이 말은 엘사를 죽일 듯 덤벼들지만, 엘사는 바람이나 불의 정령에게 그러했듯 맞서 싸우고, 얼음으로 된 고삐를 씌워 길들이는 데 성공한다. 당연하게도 “거친 말을 길들이는” 것은 영웅의 자질을 보여주는 한 예로, 각종 고전이마 건국신화부터, 가까이는 아르미안의 네 딸들까지 오도록 유구한 왕의 상징이기다. 엘사는 말을 길들여 바다를 건너고, 죽음에서 벗어나 삶으로 나온다. 이후 엘사는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는데, 이는 엘사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침내 도착한 아토할란에는 비밀의 강이 얼어붙어 있었고, 노랫소리는 더욱 가까이에서 들린다. 엘사는 노랫소리를 향해 동굴로(자신의 내면) 들어간다. 이곳에서 엘사는 전편에서의 과거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얼음으로 형상화된 것을 발견하고, 한스 왕자 형태의 얼음은 확 부숴버리기도 하고, 렛잇고를 부르던 시절의 자신을 보고는 마치 3년전 흑역사를 발견한 사람같은 표정도 짓는다. 그렇게 과거와 조우한 엘사는 (마치 “벽장을 부수고 나온다”는 말의 은유처럼) 닫힌 문과 얼음 벽을 부수고,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세우듯) 쓰러진 얼음 기둥들을 세운다. 그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내면에서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견하고 나서야, 엘사는 자신의 근원인 “어머니”와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애벌레가 번데기 속에서 “죽음과 재생”에 가까운 변신을 겪고 나비가 되듯이, 엘사는 성장하고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드레스도 바뀐다. 그때 영화관 안에 앉아 있던 모든 어린이들이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렌델과 노덜드라의 과거를 뒤쫓던 중 “혼자서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경고를 잊고, 엘사는 자신의 내면 안으로 너무 깊이 들어간다. 엘사는 주화입마에 빠지고 만다. (얼어붙는다) 그리고 안나의 앞에, 엘사가 찾은 그 단서가 얼음의 형태로 펼쳐진다. 안나는 답을 찾고, 자신의 꾀로 땅의 정령인 바위 거인들을 불러내어 댐을 부순다. 여기서 엘사는 자기가 직접 땅의 정령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안나는 바위 거인들을 굴복시키진 못햇지만 그들을 이용해 뜻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왕”이 그 “대지”에 매인 자들임을 보여준다.
댐을 부수자 댐에 갇혀 있던 물이 협곡으로 쏟아지며 아렌델을 덮칠 위기에 처하지만, 엘사는 얼음벽으로 물길을 돌리고 아렌델과 노덜드라는 모두 무사하다. 그리고 엘사와 안나는, 마치 실마릴리온에서 엘론드와 엘로스처럼, 그 길이 갈라진다. 엘사는 “여기 있으면 좋겠다”는 허니마린의 말처럼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았다.
자매의 사랑과 대립이 두 세계, 즉 제국주의와 평화, 물질문명과 자연, 합리와 마법으로 갈라지는 두 세계로 확장되어, 반목과 화해, 그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이 이야기는 무척 잘 짜여져 있다. 마법 때문이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 같은 엘사가 비밀의 강, 아니, 자신의 내면 속에서 자신이 어머니의 사랑으로 인한 선물이라는 것, 자신이 어머니/가족에게 깊이 사랑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존감을 온전히 되찾으며 힘을 발견하는 진짜 클라이막스 부분은, 영상미에서도 은유 면에서도 눈물나게 좋았다.
엘사의 여정은 “영웅 서사”인 한편, 요약해 보면 “퀴어 서사”, 혹은 그 밖에도 다른 소수자로서의 고민을 갖고 있는 관점에서도 볼 수 있다. 전편에서 자신이 남과 다르며 그것으로 인해 늘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닌가 고민하고, 남들에게 그 사실을 감춰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랐던 아이는 (Let It Go와 함께 변신하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힘은 여전히 불완전했고,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거나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기도 했으며, 동생의 사랑(온전한 이해가 아닌) 속에서야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엘사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이것은 자신의 힘에 대한 불안감인 동시에 안나가 크리스토프와 사랑에 빠져있고 곧 청혼을 받을 거라는 것, 즉 동생과의 관계가 변화할 것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엘사는 자신의 근원을 찾고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벽장을 깨고” “자존심(역시 gay pride를 떠올릴 수도 있다)을 세우며”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여 인정욕구를 채우고, 홀로서기에 성공한다. 마침내 가족과의 분리에 성공한 엘사에게, 새로운 있을 곳을 제시하는 이가 나타나고, 엘사는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작한다.
한편 전 왕비(어머니)의 “사랑”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고, 그 다리의 양 끝에 안나와 엘사가 서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사는 세계가 달라졌음에도, 안나가 엘사를 금요일 밤에 초대하면 엘사는 말을 달려 아렌델로 돌아갈 수 있는 그 결말이 좋았다. 홀로서기에 성공한다고 해서 가족과 소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사람 모두 제대로 성장하며 분리했기에 이후에도 계속 사랑하는 가족일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이고 행복한 모습 말이다.
PS) 하지만 올라프도 엘사도 계속 말하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그 워딩이 아님) 아무래도 고통이었다. (……)
PS2) 근데 엘사와 안나의 할아버지인 선선대 국왕은… 너무 전형적인 침략자 내지 제국주의자 짓을 하고 다녔고 말이지. 30년쯤 지지고 볶아 미운 정이라도 들긴 했을 것도 같지만, 아렌델 군인과 노덜드라 지도자가 팔짱을 끼는 장면은 너무 나이브했음.
PS3) 겨울왕국으로 디즈니는 엄청나게 많은 안나와 엘사 굿즈를 팔아댔고, 이번에는 더욱 파워업하여 확실하게 굿즈 장사로 한몫 잡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이며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많은 굿즈 요소들을 넣고 있다. 수확제 드레스, 평상복 드레스, 모험을 떠날 때 입은 옷, 엘사의 변신 파워업 드레스(…..), 그리고 안나가 마지막에 입고 있던 드레스까지. 게다가 인형들이 인형 옷만 따로 팔지 않는 것만 봐도 말이다. 그 뿐인가, 올라프는 중간에 옷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가방걸이용 인형으로 만들기 위해 디자인을 뽑은 듯한 불의 정령 도마뱀도 나오며, 심지어는 초반 수확제 장면에서 안나와 엘사가 걸고 있던 목걸이까지 그렇다. 누가 봐도 디즈니 프린세스적 목걸이(…..) 같은 게 아니라, 직장 여성이 셔츠 속에 입을 만한 데일리 목걸이로 만들 수 있을 듯한 디자인이었다. 하긴, 이미 개봉 2주 전부터 공화국의 마트는 자본주의의 여왕 엘사가 지배하기 시작했고, 얼마 전까지 장난감 코너에서 제일 잘 보이던 자리에 있던 엉덩이 탐정 굿즈들이 있던 자리에 겨울왕국 스케치북과 연습장(……)이 놓이는 모습도 보았는걸.
댓글
“겨울왕국 2 : 여성 영웅이 자신의 근원을 되찾는 여행, 혹은 퀴어가 자신을 인정하는 과정”에 대한 2개의 응답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왕국 2를 보고 나서
암흑의 핵심(조셉 콘래드) 초반부에서 반복하여 강조되는
“강” (기억이 가득한 강)과 “북쪽”, 제국주의적인 테마(ex. 노털드라 토착민과의 갈등)가
상당히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었는데 혹시 어떻게 느끼실까요??
(글쓴이께서 2010-11-15에 암흑의 핵심에 대해 쓰신 것도 보았습니다)
비단 암흑의 핵심 뿐 아니라, 문학 속에서 제국주의와 자연의 대립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작품에서 두루두루 발견되는 부분이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느냐, 혹은 인간(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태도로 은유하느냐 같은 표현 방식들이 있겠지만요. 겨울왕국 2에서는 특히 대과거(할아버지)의 제국주의가 낳은 파멸, 과거(부모)가 사랑과 화해를 꾀했지만 피해자에 대한 사과가 수반되지 않은 것, 그리고 현재에서 책임감을 갖고 움직이는 모습을 병렬적으로 잘 보여주는 형태로 갔고요. 강에 대해서는, 신화적인 물, 바슐라르적인 물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한 부분이고요. 사실 굉장히 원형적인 이야기들이고, 이걸 아주 훌륭하게 담아냈어요. 원형은 문자 그대로 원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