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을 비롯하여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일본어판에 삽화를 그렸던 삽화가이자 수필가 다카야나기 사치코가 “빨간 머리 앤”의 세계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대목들을 골라 색연필화를 그리고 설명을 넣은 그림 에세이집. 작가가 사랑하는 부분들을 그리다 보니, 매슈의 죽음이나 앤이 창피를 당했던 부분 등이 아니라, 앤이 설레고 행복해 하는 장면들 위주로 담겨 있어서 읽고 있으면 “빨간 머리 앤”의 가장 좋은 순간들만 떠올릴 수 있는 책. (그리고 “초원의 집”에도 나왔던 커다란 둥근 깔개 만드는 법이 나와 있다. 어지간한 수예품은 만들어 볼 생각이 안 드는데 이건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좀 들었다.)
한편으로 일본과 빨간 머리 앤, 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몇년 전 NHK 드라마로 “하나코와 앤”이라는 드라마가 나왔다. NHK 사극은 꽤 정극에 해당한다고 들었는데, 근대 여성 인물인 번역가 무라오카 하나코를 다루면서 아예 제목에 “하나코와 앤”이라고 그의 앤 번역에 대해 직접 다루고 있어서 조금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형제들이 입을 줄이기 위해 입양되어 가던 가난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성이 공부하기 쉽지 않았던 시기에 열심히 공부하고, 영어를 배워 더 넓은 세계를 접하고, 번역가가 되어 많은 어린이들에게 꿈을 전하는 앤 시리즈를 번역했던 무라오카 하나코의 일생이 가난한 고아 출신인 앤과 겹쳐지니 이야기를 짜는 것은 무난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빨간 머리 앤은 일본에서 얼마나 중요한 작품인가”가 궁금했다. 이를테면 뤼팽 덕후로 괴도 뤼팽 시리즈를 번역하면서 미발표작까지 전세계 최초로 번역 출간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성귀수 번역가의 일대기로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를 만들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이만큼 다루는 것은 앤이라는 작품 자체가 일본에서의 위상이 크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무척이나 사랑받는 저 타카하타 이사오의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이라든가, 홋카이도에는 공원 안에 그린 게이블스를 재현해 놓은 곳도 있다고 하고,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지간해서는 번역가에 대한 드라마가 나오기도 어렵고, 삽화가가 특정 작품에 대한 자신의 덕심을 담아 그림 에세이를 내기도 어렵지 않나 생각할 때, 일본에서의 앤의 위상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물론 우리나라의 초기 앤 번역들이 일본판의 중역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무라오카 하나코의 앤이 우리 나라에서 읽힌 앤 시리즈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은데.
…..힐링 에세이로 홍보하는 책을 읽다가 생각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