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모 대기업을 연상하게 하는 재벌기업 “트라이 플래닛”의 경영권을 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이 소설은, 정말 슈뢰딩거의 회장님이 되신 어느 분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많다. 한국적 배경에 재벌 가문에 상속 문제가 나오는데, 당연히 아침드라마의 진한 미원맛마저 느껴져서 한번 잡으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그런데다 “뛰어내리실래요?”같은 리얼리즘 충만한 대사까지.
테세우스의 배 역설은 플루타르코스가 언급한 것인데, 테세우스가 탔던 배가 아테네 인들에 의해 보존이 되면서, 부식된 부분을 뜯어내고 새 목재로 덧대기를 거듭해 마침내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을 때 이것은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다. 경우에 따라 원래의 낡은 부품을 따로 두었다가 나중에 그것으로 다시 배를 조립했을 때, 어느 쪽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인가에 대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 문제를, 사고로 빈사상태가 된 회장님의 전신을 뇌세포까지 전부 차례대로 갈아끼운 컨티넘, 갈아끼우며 떨어져 나간 시신들을 배양수조에 넣어 다시 키워낸 보디, 그리고 유사시를 위해 복제한 인격인 메모리, 이 셋 중 누가 진짜 회장님인가에 대한 문제로 치환한다. 컨티넘 석진환에게는 그의 세포는 남아있지 않지만 빈사 상태의 몸을 조금씩 교체해 가며 만들어진, 그야말로 테세우스의 배다. 그는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의 기억들과, 죽은 딸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그의 시체 조각을 재생시켜 만들어낸 보디 석진환은, 생체정보로는 진짜이지만 기억이 없다. 그러면 과연 누가 친척들을 협박하여 넘겨받은 주식들과 경영권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이 회장, 석진환과, 아버지의 형제들, 그리고 석진환과 권력다툼을 벌이는 여동생 석미진의 관계는, 역시 모 대기업의 슈뢰딩거 회장님의 자제분들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아침드라마적 애증관계가 돋보여서 정말 흥미진진하다. 자기 오빠를 괴롭히고 죽이려 들면서도 또 가장 보호하려 하는 뒤틀린 애정, 아니 애증의 여동생이라니, 너무나 미원을 들이부은 듯한 막장이잖아요, 이거. 여기에 충신인 척 하면서 뒤통수를 치는 이현석 역시도, 얘가 가만 보면 석진환 회장을 너무 사랑함. 보고 있으면 넌 제발 솔직해지고 컨티넘 회장님과 예쁜 사랑 하시라는 생각이 막 불쑥 솟구친다. 보디 회장님은 소원대로 멀리 떠나서 새로운 신분으로 행복하게 사시고.
그렇게 처음에는 누가 진짜 회장님인지를 두고 흘러가던 이야기는, 미진의 입을 통해 결국 이 이야기가 죽음의 정복에 대한 이야기,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기 직전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한편으로 이 세계에서 만약 그 아버지를 보존해서 살려냈다면 이야가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그 생각도 계속 하게 된다. 그런데다 재벌가문의 상속이나 권력다툼을 그린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주주총회며 차명주주의 문제가, 이 이야기에서는 정말 근사하게 SF적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며 진행된다. 이야기 전체에서 그 부분은 무척 짧았지만, 내겐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요 몇년간 한국에 SF가 본격적으로 나오면서, 장르소설이면서도 조금은 엄숙한 것을 갖고 있으려고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이 소설은 정말 빠르고 유쾌하며 막장스러운데 SF로서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추고 있어서 정말 좋았다. 세상에, 어떻게 매년 이렇게 훌륭한 작가님들이 계속, 게임 내 필드에 몬스터 리필되듯이 계속 나타나신단 말인가.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는 배가 아파서 하루동안 몸져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