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술

아무튼, 술 – 김혼비, 제철소

아무튼, 술
아무튼, 술

작가와 술에 대한 자전적인 책은 의외로 많다. 니노미야 토모코의 “음주가무 연구소”라든가, 미깡 작가님의 “술꾼 도시 처녀들”이라든가, 일본 쪽의 각종 에세이 만화들이라든가. 고전으로 들어가면 정철의 “장진주사”같은 것도 여기 해당할까. 어쨌든 김혼비 작가도 이런 선인들의 글을 본받았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어느날 주(酒)류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술에 대해 쓰자. 술책을 쓰는 술책을 쓰자. 이 술책 앞에서라면 더는 저에게 비주류라고 한숨 공격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가의, 술에 대한 역사가 펼쳐진다. 대학입시 백일주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술이 이 사람을 만들었구나 싶을 만큼 다양한 술 이야기가 이 작은 책에서 끝도 없이 나온다. 아니, 대체 수능 80일을 앞두고 ’80일간의 세계일주(酒)’를 먹자고 제안하는 고등학생이라니 이건 너무 천부적인 주류가 아니십니까, 선생님.

당장 우리 회사에도 위나 대장 내시경을 하고 나서는 알콜로 소독한다며 술을 마시는 술꾼들이나, 맥주를 하도 마셔서 통풍에 걸렸는데 통풍 환우회를 조직해서는 “맥주는 아프지만 소주는 괜찮다”며 소주를 마시고 다니는(안됩니다) 사람들 등등, 술 이야기를 하면 끝이 없지만, 사실 남의 술 이야기란 대체로 진부하다. 세상은 넓고 술꾼은 많으며 남의 술버릇이나 술먹고 한 실수 이야기들이야 대체로 거기서 거기니까. 특히 술 마시지 말라고 의사가 말한 것을 어기는 이야기들은. 그런데 이런 이야기조차도 신나게 읽히게 쓰다니, 과연 작가란.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에 감동하는 대목에서 나는 그동안 술을 뭘로 먹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인생의 사소한 대목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데!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대목은 작가의 술버릇이나 술먹고 한 대환장쇼 이야기들이 아니다. 내가 읽다가 숨이 넘어갈 뻔 한 대목은 무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술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었다.

술이란 건 참 시도 때도 없이 시제에 얽매이지 않고 마시고 싶다는 점에서나, 마시기 전부터 이미 마시고 난 이후의 미래가 빤히 보인다는 점에서나,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앞일 뒷일 따위 생각 안 하는 비선형적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헵타포드어 같지 않은가.

테드 창이 읽으면 충격을 받을 것 같은 이 놀라운 언어의 마술과 함께, 작가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클라이막스라 할 만한 대목을 인용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건 바로 내가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겪는 딜레마다.

이게 어느 대목에 나오는 대사였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아, 이 책을 읽다 보니 정말 나는 지난 20년 동안 술을 헛 먹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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