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노조와 신뢰의 비용

디콘지회에 기대를 많이 했었다. 더 많은 것들, 상황들,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일들, 마이너한 장르, 신인들의 문제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랐다.

앞으로라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 자기 데이터를 그쪽에 오픈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뢰를 쌓는 비용은 정말 큰 것인데.

만화/웹툰을 하고, 일반서를 하고, 전연령가 웹소설을 하고, SF를 하고, 이것저것 손을 대고 계약서를 써 보았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계약에 대해 더 잘 알까? 필수적인 것들은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남성향쪽이나 19금쪽, GL이나 BL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학습만화는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여성향을 하는 회사의 PD님이 남성향 쪽의 계약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을 본 적 있고, 또 남성향 위주의 PD님이 여성향 쪽 계약에 대해 질문하는 것도 본 적 있다. 출판 위주로 가는 업체의 편집자 님이 MG 개념에 대해 공부하시는 것도. 업계인, 심지어 경력이 되시는 PD들도 다 알지 못하는 게 이쪽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가들은 아마 신인의 계약에 대해서는 또, 어떤 부당한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저작권 관련 변호사나 덩치가 큰 콘텐츠 기업의 법무담당쯤 되지 않는 한, 개인개인은 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조직은 그것들을 알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피아를 식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것은 적군과 아군의 문제와는 다르다. 그런 것을 생각할수록 속이 쓰리고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우리들은, 이라고 해야 할 지, 당신들은, 이라고 해야 할 지, 아직 나는 피아식별을 못 하고 있는데. 어쨌든 더 잘 할 수 있었다. 그 기회를 왜 최악의 선택지만 골라서 갔던 것일까.

싸움이 과열되다가 갑자기 마구 폭발하기 시작하던 날 나는 군산에 가 있었다. 다음 날은 몸살이 나서 SNS를 들여다 보기도 어려웠다. 그 이틀간 조용했던 덕분에, 나는 큰 충돌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거고, 또 그때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한 마디라도 제동을 걸었다면 싸움이 커지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자꾸 그 일들을 생각하니 우울해지고 글이 손에 안 잡혀서 한동안 트위터를 비공으로 돌려놓았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덕질 이야기만 하면서 좀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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