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기억

종이상자에 든 열두 색 티티 크레파스, 하늘색 나일론으로 된 미술가운(사이즈가 한가지였는데 나한테 많이 커서 엄마가 목과 소매에 고무줄을 넣어줬었다.), 군청색에 노란 테두리가 둘린 유치원 가방과, 빨간 비닐을 씌운 유치원 수첩, 불타는 두부같이 생긴(튤립모양입니다) 이름표. 창문 아래 놓여 있던, 낮은 신발장을 세로로 나눠서 입고 온 잠바를 걸어놓을 수 있었던 아기들 사물함, “쌍둥이 슈우퍼맨”같은 책이 꽂혀 있던 책꽂이와 낮고 동그란 탁자들과 냄새가 나던 석유난로, 선생님이 우유를 넣고 끓이던 찌그러진 노란 양은 주전자, 얼룩이 있던 멜라민 컵과 우유 피막. 옆구리에 흰색 줄무늬가 있는(지금도 있다) 지구 색연필과 깍두기 공책, 선생님이 은박 접시에 찰흙을 펴서 담아준 데다 손바닥을 꾹 누르고 선생님과 부었던 하얀 석고반죽, 재롱잔치 할 때 입었던 타이즈(평소에 치마를 안 입어서 입을 일도 없었던), 좁은 복도의 끝 계단을 올라가 2층 교실. 2층 구석에는 빨갛고 높은 의자가 몇 개 있었는데 나는 졸업할 때 까지 거기 못 올라갔다. 속으로 “민친 선생처럼 못되게 생겼어”라고 생각했던 화장이 진하고 늘 뭔가 화려했던 원장 선생님과, 동글동글하고 머리가 짧고 체크무늬 바지를 잘 입던 젊은 담임 선생님. 그 담임 선생님이 우리가 졸업하고 곧 유치원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가면서 우리가 다니게 된 국민학교 앞에서 우리 얼굴을 다 보고 간 걸 나중에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유치원인데 한 반에 40명이나 되고, 그 40명을 겨우 스물 몇 살이던 젊은 선생님 한 명이 혼자 다 맡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국민학교에 갔더니 한 반이 70명이었고 담임선생님은 한 명……) 우리 옆반 선생님이 원감을 겸하기도 했던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 극한직업이었다. 그 선생님들이 늦가을이 되자 유치원 선생님들이 보는 잡지 로고가 작게 들어간 포스터를 쌓아놓고 매직펜으로 “관인 뫄뫄 유치원”하고 유치원 이름과 전화번호를 직접 쓰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지, 홈페이지도 디지털 소량인쇄도 없었으니까여……;;;;; 엄마 손을 잡고 가서 원서를 썼다. 모나미 볼펜이었다. 오리엔테이션 날에는 선생님이 종이를 들고 이름이랑 엄마 이름, 숫자 1에서 10까지 셀 수 있는지, 그런 것을 물어보고 2단짜리 계단에 오를 수 있는지, 거기서 매트로 뛰어내릴 수 있는지(못 뛰어내리고 울었다), 선을 긋고 블록을 쌓을 수 있는지 시켰다. 노란 유치원비 봉투에는 동그랗게 단추가 두 개 달려 있고 끈으로 감게 되어 있었다. 열두 번 도장을 찍는 칸이 있어서, 그 봉투가 영수증이라고 말했지. 졸업하던 날에는 작은 학사모에 까만 가운을 입혀줬는데, 내 키가 작아서 그게 발목까지 끌려다녔지.

그랬던 것들을 생각한다. 갑자기 훅 늙어버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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