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그 중에서도 변호사라는 전문직 출신이자, 남편의 대통령 재임기간 중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공통점 때문에라도 읽는 내내 몇년 전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자서전을 읽을 때와 계속 비교하게 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읽을수록 공통점보다는 차이가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똑같이 부모님의 관심을 받으며 좋은 성적을 거둔 알파걸이자 명문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를 갖고 있으며 퍼스트레이디가 된 여성이라도, 사업체를 경영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힐러리 클린턴과, 크게 부족함은 없었다고 말하지만 쇠락해가는 지역에서, 아버지는 오랜 지병을 앓고 있는, 흑인 가정 출신의 미셸 오바마의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다음으로 힐러리 클린턴은 자서전이 나왔던 무렵에는 이미 상원의원이었는데다, 차기 대선 후보로 꼽히던 사람 중 하나였으며, 책에서도 그와 같은 야심이 많이 묻어 있었다. 왜, 대권주자 자서전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런 것들. 하지만 미셸 오바마는 일단 자신이 대선에 출마할 계획은 없음을 밝혔고, 책에서도 그런 야심이 강조되진 않았다. 워킹맘으로서 일과 가정을 함께 이끌어나가는 것, 이상주의자인데다 너무나 바빠서 가사나 육아 분업이 제대로 되지 않는 정치인과의 결혼생활, 직업적인 고민 같은 쪽이 많았으며, 그 가운데 일관되게 여자친구들, 여성멘토들과의 자매애를 강조하고 있었다.
내가 젊은 변호사였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되짚어 보았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당시 내가 스스로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그때 내게 정곡을 찔러주는 여성 멘토가 있었다면 지적해 주었을 만한, 사실상 간단한 문제였다.
제 2의 창작인 번역 면에서도 그렇다.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은 남성 번역가가 번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고민과 여성들의 연대에 대한 언급이 가득한 책을 여성 번역가가 번역한 결과물은, 그만큼 현장감이랄까, 쓰는 사람만큼 번역하는 사람도 고민을 했겠구나, 그리고 읽는 사람까지 고민하게 하는구나, 싶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성난 흑인 여성”이 이 표현의 순환논리에 사로잡혔을까? 남들이 우리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히 목청을 높이게 되지 않나? 남들이 우리를 성난 사람이나 감정적인 사람으로 치부하여 무시하면, 자연히 없던 화도 나고 울컥하는 감정도 생기지 않나?
여성으로서, 그리고 흑인으로서 받는 차별에 대해서. 그 와중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엘리트 계층”이라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 출신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살던 지역이 게토화되고, 패배감이 짙게 드리우는 가운데 노력으로 명문고에 진학하지만, 그곳에서 사다리와 동아줄 같은 특권과 연출의 세계를 엿보는 사춘기 소녀의 감정에 대해서. 계속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당신에게 알아서 적응하고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남들과 똑같이 잘 연주해내라고 요구한다. 물론 못 해낼 일은 아니다. 소수 인종 학생들과 저소득층 학생들은 늘 이런 과제를 극복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려면 에너지가 든다. (중략) 그런 환경에서 입을 열고 존재감을 발휘하는 일에는 노력이 들고 별도의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게는 “여성”의 일로 읽혔지만, 사실은 혼재된 것이다. “스스로를 내보일 기회를 얻기”도 전에 먼저 “자신에게 씌워진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때로는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가난하거나, 여성이거나, 유색인종인 이들의 문제. (확장하면 성소수자 문제나 장애인 문제도 연결된다. 이는 소수자의 문제이고 상대적인 약자의 문제가 되니까.)
그 속에는 거의 늘 인종에 대한 암시가 은근하지도 않게 담겨 있었다. 유권자들의 마음 속 깊이 담긴 추악한 공포심을 부추기려는 의도였다. 흑인들이 권력을 쥐게 놔두면 안 됩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달라요. 그들의 비전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해 서술한 부분들도 인상적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버락 오바마의 경쟁자였고, 미셸 오바마에게는 전문직 워킹맘 출신으로 백악관에서 사춘기 딸을 키워낸 경험이 있는 선임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이 출마했을 때, 그녀가 지지 연설을 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배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그녀가 있는 그대로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에 대해 더 많이 언급했다.
사람들은 클린턴의 성별을 들먹이면서 쉴 새 없이 공격했고, 여성에 대한 온갖 추악한 고정관념을 덧씌웠다. 그녀를 남자를 쥐고 흔드는 여자, 바가지꾼, 쌍년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쇳소리라고 비난했고, 그녀의 웃음소리를 암탉 울음소리라고 표현했다.
중요하진 않지만 인상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녀가 프린스턴에 합격하고 고향을 떠날 때, 그때까지 사귀었던 남자친구를 차버리는 부분이었다. 그 남자친구는 착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떠나기로 한 “과거”의 사람이라서 정리하고 얼버무리듯 헤어지는 대목을 읽으면서, “야심을 갖고 고향을 떠나 명문대에 진학하면서, 자신이 떠나온 과거의 일부인 남자친구와 작별하기로 결정하는” 여성인물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었나 생각했다. 없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부분 중 하나인 버락 오바마에 대한 서술이 굉장하다. “물건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아두는 남자, 옷을 개키지 않는 데 대해 가책을 전혀,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는 남자”이자 “삶의 거대한 생존경쟁이나 30대 변호사가 추구할 만한 물질적 보상을 아름답게 망각”하고, 계약한 글을 쓰기 위해 동굴(…..)이 아니라혼자 사색에 잠기기 위해 “설령 그 방식이 겉으로는 그냥 해변으로 놀러 간 것 처럼 보이거나 나와의 신혼여행을 마치자마자 자기 자신과의 신혼여행을 떠난 것 처럼 보이”는 것을 감수하고 이역만리로 떠나는데다,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할 거냐고 묻자 “내가 책을 한 권 더 쓸 거야. 베스트셀러를 써서 돈이 되게 할 거야.”같은 소리를 하는 주제에, 출마를 고려하면서 아내와의 대화는 계속 회피한데다, 백악관에 들어가서는 “집안일에 관한 의무와 걱정을 몽땅 떨칠 수 있는 것이 그저 기쁜” 버락 오바마라니. 그녀의 남편이 결국 상원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재선에도 성공을 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읽고 댓글 남기는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도망치세요, 안전이별 기원합니다”를 외칠 네이트판의 흔한 문제 남편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는 이제 아빠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우리를 따라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락 오바마는 일과 가정의 문제로 아내가 단호하게 나올 때 함께 가족 상담을 받을 만큼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게 흔한 네이트판 남편들과 분명하게 선을 긋는 점일까. 일단 그의 능력치나 다른 점들을 제외하고서라도.
하지만 미셸 오바마가 육아와 직장일을 병행하느라 근무시간을 줄이고 임금은 줄어든 채 그 시간 안에 한주 치의 일을 하느라 동동거리는 동안 오바마는 그 커리어에 흠집 하나 가지 않고 재선에 성공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속이 상했다. “버락의 정치 경력을 용인한 뒤로 – 즉, 그가 마음껏 자신의 꿈을 추구하도록 허락한 뒤로 – 나는 내 일에 들이는 노력을 좀 줄였다.”고 말하게 될 때 까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지켜야 했다고 말하는 이 일을 좋아하는 여성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 전 둘째 아이를 낳은, 그리고 두 아이 모두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기 위해 역시 매일 배에 주사를 놓았던 나는 그녀가 임신을 위해 노력하는 대목을 읽다가 조금, 사실은 꽤 속상해서 입술을 꾹 깨물며 읽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집 욕실에 앉아 그 소망의 이름으로 내 허벅지에 주삿바늘을 꽂을 용기를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정치에 대해서, 또한 버락이 흔들림없이 정치에 몰두하는 데 대해서 처음으로 희미한 분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중략) 이후 몇 주 동안 그는 아무 지장 없이 평소처럼 일했지만, 나는 매일 병원에 들러서 초음파로 난자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피를 뽑을 필요조차 없었다. 회의를 취소하고 자궁경부 검사를 받으러 갈 필요도 없었다. (중략) 내가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는 동안, 버락은 한 발짝도 헛디디지 않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