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아내와 어머니 사이의 고부갈등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의 감독이 영화에 다 못 담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다고 하는 책. 하지만 미리 경고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혈압이 오를 것이다. 특히 밥 먹으면서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체 저 남자는 자기가 뭘 잘했다고 저런 걸 쓰면서 자기모에화까지 하고 있단 말인가!
그 구구절절하게 혈압오르는 이야기의 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이 책의 남편이자, 저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 결혼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그는 본인의 말로는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책임감’이었으며,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로망도 관심이 없고, 자유롭고 무책임한 상태를 즐기는 한편 탕웨이와 결혼한 김태용 감독을 보며 ‘언젠가는 나도….’를 읊조리며 살던 중, 그만 피임에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중식이 밴드의 노래를 인용하며 두페이지 반을 날로먹는다) 그래놓고는 낙태하겠다는 그녀에게 “나랑 그냥 엉망진창으로 살자”며 배째라고 드러눕기를 시전, 결혼에 골인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혈압이 죽죽 오른다. 자기 자신을 희화화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과장을 했을 것이라고 애써 이해하며 읽으려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을 거라고 가정하더라도 이건 심하다. 솔직히 말하면 직업이 안정적인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돈을 버는 것도 아닌 남자의 아이를 난데없이 임신한 여자친구에게 임신을 했으니까 결혼을 하자며 배째라고 드러눕는 게 어디로 봐서 책임감이 있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행동인가.
여기까진 그래도 뭐, 그냥 읽었다.
진영씨의 친정 부모님이 딸이 성공하길 바라며 공부하라고 지지하고, 진영씨는 사법고시 2차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얼마든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남의 집 귀한 딸을 임신으로 발목잡은 게 아니냐 싶으면서도, 딸인 그녀가 부모님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자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말씀에서, 내 뚜껑은 열리고 말았다.
애가 순진하다, 데리고 가르치면 되겠다, 생각했지. 호빈이도 계속 ‘몰라서 그러니까 가르치면 돼. 얘기하면 돼.’ 그래서 얘기하면 되겠다, 그랬는데 그게 아니잖아. 얘기해도 안 듣잖아.
사법고시 2차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건 1차를 붙었다는 것이요, 머리로 보나 뭘로 보나 부족할 게 없는 여자인데, 순진하다, 데리고 가르치자, 그런 식으로 낮잡아 봤다는 것 부터가 기가 막힌데다가.
그냥 진영이가 호빈이 직업도 없는데 그렇게 결혼해 준 건 고마운데, 이게 뭐…… 걔로 인해서 집안이 파탄이 나고, 엄마아빠가 아들 하나 잃은 거고, 집안을 잃은 거고, 너무 우울하고……
웬만큼 괜찮은 집안의, 머리좋은 딸이, 그 댁에서 보기에도 “직업도 변변히 없는” 아들을 데리고 살아주는데 저렇게 말하고 싶은가, 에 대해서 정말 읽으면서 혈압이 안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 자기고백적인 부분들을 읽고 있으면, 애초에 결혼이 아니라 만나는 것도 신중을 기했어야 할 남자가 아닌가 싶은 느낌이 구구절절 들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말이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친구들 중 가장 럭셔리한 자취 생활을 했다. 호화로운 집에 거주했던 것이 아니다. 내 방 냉장고에는 항상 다섯 가지 이상의 반찬이 들어차 있었다. 어머니가 자주 서울에 와서 반찬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내려가면 친구들은 우리 집에 몰려와 밥을 먹었다. (중략)
나는 어머니 덕분에 편하게 살았다. 반대로 일상적인 생활 능력이 없다. 자취를 10년 넘게 했으면서도 달걀프라이 말고는 할 줄 아는 음식이 없다. 나는 어머니가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럽다.
……이쯤되면 이 책을 읽으면 혈압이 오른다는 사실을 주변에 널리 알리는 것만으로도 내가 덕을 쌓는다는 기분이 들 정도다. 자식이 오죽이나 못 미더웠으면 자취생활 내내 어머니가 서울에 오셔서 반찬을 하고 가셨을까. 아들은 그 재료비와 노동의 가치, 그리고 어머니의 왕복 차비에 대해서는 생각이라는 걸 했을까? 생각을 했으면 소분해서 냉동실에 적당히 두고 귀하게 아껴먹지는 못할망정 어머니가 다녀가시면 친구들이 몰려와 밥을 먹고 갔다는 걸 당연하게 적었을 리 없다. 어머니의 노고로 다섯 가지 이상의 반찬이 늘 상비된 생활을 했으면서, 자기가 달걀프라이 말고는 할 줄 아는 음식이 없다면서 어머니가 원망스럽다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기까지만 해도 사회인으로서 갈등 해결을 위한 성숙한 태도를 제대로 보이지도 못하는 남자가, 어머니와 아내가 싸울 때는 걸려오지도 않은 전화를 받는 척 하며 도망이나 치면서 아내는 이상한 여자인 걸까, 그런 소리나 하는 것을 내가 왜 밥먹으며 읽고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진짜는 따로 있었다.
고양이라는 존재는 우리 부부 사이, 그리고 부모님과 우리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부부간에 감정이 날카로울 때 고양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진영이가 미울 때 나는 고양이를 괴롭혔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아내가 밉다고 아내의 반려동물을 괴롭힐 수 있는 사람, 그러고 싶은 충동을 숨기려고도 들지 않는 사람은, 아내와 부부싸움을 했을 때 아내를 괴롭히기 위해 자식을 인질로도 삼을 수 있는 사람이다. 진심으로 읽으면서 저자의 아내, 진영씨가 걱정되었다. 그런데다 글 곳곳에 묻어나는 패배주의는 읽는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처럼 강자가 될 자신이 없었다.
읽는 내내, 복학왕의 사회학 을 읽을 때의 정서가 느껴졌다. 가부장의 시대는 지나고 있고, 가부장이 될 능력을 지니지 못했으면서도 가부장이 되고 싶어하는 정서가. 다행히도 저자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갈등이 바로 이 가부장제에서 기인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이해한 고부갈등을, 군대에서의 문화에 대유하여 이해할 수는 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이등병과 병장은 궂은 일을 책임지는 약한 고리다. 장교들은 안락한 중대장실에서 허름한 내무실을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훈계한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 해결될까. 진영씨는 마지막에 다시 시가에 찾아가고, 시어머니가 사준 옷을 아이에게 입히기도 한다. 시가로부터 이해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전보다는 덜하다고 하나 시부모는 여전히 며느리를 평가하려 들고, 둘째며느리와 비교하려 든다. 그녀가 양보한 것이고, 그것은 남편과 아이에 대한 배려로 보인다. 씁쓸하지만 현실적인 결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자는 너무 복잡한 생물”이라며 “내가 고부관계를 이해했을 것 같아요?”같은 우스꽝스러운 삽화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자기 희화화라는 방식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을까, 하고 생각하며 꾹꾹 참고 읽던 독자가 저자를 마음껏 욕하고 저주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게 아니라면, 대체 왜 이 책을 굳이 써야 했는가. 왜 말같지도 않은 변명을 굳이 늘어놓을 자리가 필요했는가. 21세기에도 계속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부갈등에 대해서라면 그 다큐 자체로 충분한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드는 결말이다. 대체 왜. 이 뻔뻔하고 파렴치한 결말은 대체 왜. 이건 글러먹었어. 진영씨, 도망쳐요. 하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이 결말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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