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왕의 사회학

복학왕의 사회학 – 최종렬, 오월의봄

올 초까지 만화 “PermIT!!!”을 연재했다. 인서울은 아니지만 수도권의 썩 나쁘지 않은 공대에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이야기의 웹툰이었다. 이 만화를 연재하는 동안 대학을 배경으로 한 다른 만화나 웹툰들을 이것저것 찾아보았고, 그 중 하나가 복학왕이었다. 전에 유어마나와 인터뷰를 했을 때도 말했지만, 이 만화는 어떤 의미에서 PermIT!!! 과 아주 대척점에 있으며,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의 리얼함”을 뼛속깊이 보여주는 만화라고 생각했다. 작가에 대한 호불호나 그의 여혐이나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생각은 차치하고, 적어도 작가가 자신이 겪은 것에 대해서는 잘 표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올해, 벼르다가 이 책을 읽었다. 웹툰 복학왕에서 시작하여, 지방 청년들에 대한 생각과 행동, 심리, 그 부모와 가족에 대해 분석한 책이다. 대구 쪽의 지방대학의 재학생, 졸업생(졸업 후 지방에 남은 사람과 서울로 상경한 사람으로 나누어서), 그리고 그 부모에 대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데, 특히 여기서 말하는 가족주의, 가부장제에 대한 집착이 작년인가, 시사인에서 다루었던 일베 청년들에 대한 기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지역에서 나고 자란 지방대 출신의 청년들 뿐 아니라, 지방 출신으로 수도권에서 가부장이 되는 데 성공한 아버지의 가족들이 겪는 문제들과도 연결하여 생각할 부분이 눈에 띈다.

정수복(1953년생, 사회학자)은 자신을 넘어선 세계에 대해 알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알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지방대생은 ‘모르고자 하는 열정’에 갇혀 있다.

이 모르고자 하는 열정에 대해 처음에는 웹툰 “복학왕”에 나오는 “무식한 기안대생들”의 일상을 떠올렸으나, 실제로는 여기서 주목하는 부분은 그게 아닌 다른 쪽이다. 자기계발의 의지보다 자기보존의 의지가 강하며, 가족주의의 틀에 수렴하고자 하는 것의 연장인 것이다. 이 책의 바탕이 된 동일 저자의 논문인, “한국사회학”에 수록된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방대생은 가족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며, 이를 ‘성찰적 겸연쩍음’이라는 규범을 활용해서 추구하고, 이를 실제 실행할 때에는 습속을 따라 한다. 지방대생은 ‘적당주의 집단 스타일’을 통해 자기계발 담론을 걸러낸다. 지방대생은 경쟁 밖에 자신을 놓으며, 설사 경쟁에 뛰어든다 해도 느슨하게 하며, 경쟁 과정과 결과에 대해 서로 거의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성찰적 겸연쩍음과 적당주의는 저 가족, 특히 가부장 중심적인 부분과 연결된다. 자신이 선호하는 삶을 살고 싶지만 무엇을 선호하는지 알지 못하는 지방 청년들은 당장 가능해 보이는 것, 평범한 가정을 꾸려 가족과 행복하게 오래 사는 것을 추구한다. 가치있는 삶 자체보다는 실현 수단인 돈에 대해 말한다. 큰 야심 대신 “일하면서 적당히 월급 받으며 즐겁게 사는” 평범한 가정을 희망한다. 이것은 이상적인 평범성이다. 이들은 일차집단(가족, 친구)의 사랑이라는 인정 형식 속에서 살아가고,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았던 경험을 공유하며, 기업을 대화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가는 상황예절을 중시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자기존중을 실현하지 않는다.

지방대생은 김홍중의 생존주의 세대 코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최고 가치는 생존이다. (중략) 김홍중의 생존주의자에게 생존은 “경쟁에서 낙오되지 말자”는 것인데 반해, 지방대생에게 생존은 “가족 안에 머물자”는 것을 뜻한다. 생존주의자는 낙오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하지만, 지방대생에게 생존은 오히려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지금처럼 가족 안에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권리 인정 형식을 통해 자기존중의 길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어느정도 자학에 가까운 형태인 성찰적 겸연쩍음(나는 지방대 나왔으니까 남들보다 열악한 직장에 취직하는 게 당연하다)을 보인다. 행위를 자기계발로 안내하지 못하니 적당히 남들 하는 것을 따라한다. 노력해도 성취를 이룰 수 없으니 성실하게라도 하자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그러다 보니 성적이 아니라 출석에 집착하거나 하는 형태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상경하여 성공주의와 생존주의 코드는 물론 몰입주의 집단 스타일을 만나게 되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들은 서울에서 생존주의자가 되거나, 귀향하여 다시 가족주의의 품 안으로 되돌아간다.

포항에는 아직 ‘동네’가 살아 있다. 아이를 시어머니 혼자 키우는 게 아니다. 지역 공동체가 함께 키운다.

지방에서는 능력있는 가부장 역할을 하는 것이 어느정도 가능하며, 지방의 남성청년들은 능력있는 가부징이 되는 것을 삶의 가치로 여긴다. 목적 수단을 따르는 것이 아닌 어릴 때 부터 몸에 익힌 습속을 따라 움직인다. 자아를 가족 밖의 경쟁의 장에 놓지 않으며, 유사 가족 연결망으로 이어지는 소수, 소규모 사람들과 유사 가족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는 자신을 경쟁 밖에 두는 것으로, 경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비윤리적 행위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수용은 가족적 자아를 가지고 살면 경쟁에서 낙오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집을 나와 홀로 큰 세계에 나가는 체험을 해야만 삶을 치열하게 살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잘 안다. 수용은 후배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느냐는 물음에 가족 안에 머무는 것이 문제라고 정확히 지적한다. (중략) 이걸 뻔히 알면서도 자신이 자꾸 가족 안에 함몰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

어떤 지방 출신의 지방대 졸업생들은 취업을 통해 상경한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명문대 출신들을 긍정적 준거로 하여 만들어진 몰입주의를 중심으로 하며,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말하고 해결하며, 자신의 자아를 계속 변화와 혁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부동산 비용 등 자본의 문제로, 수도권에서는 가부장적 핵가족을 꾸릴 수 없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아내는 가정을 지키는 형태의 부부 중심의 가부장적 핵가족은, 서울에서는 이루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한편 지방에서는 서로 낮은 기대를 충족시키며 살아온 결과로 갖춘 것이 별로 없음에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출산도 한다. 수도권에서 벌어진 문제의 해결책은 대개 지방에 있는 가족이 된다. 밖에서 활동하다 문제가 생기면 되돌아가고, 다시 여기서 자신이 알던 형태의 가정을 꾸리려 한다. 일부는 수도권에서 목적 수단 범주를 체화하여 그를 실천하고, 이를 통해 다시 가부장적 삶으로 되돌아간다.

형식은 줄곧 주변의 습속을 따라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략) 이후 형식은 목적 수단 범주를 통해 자신의 삶을 조직한다. 가족 및 유사가족과 단절하고 오로지 홀로 공부에만 몰입했다. 그 결과 지방대생이 그렇게나 원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결혼을 통해 자신만의 새로운 가족을 꾸렸다. 이제 대학 동창들과 계 모임도 갖는다. (중략) 다시 유사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를 저자는 ‘가족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지방대생의 능력으로는 지방에서도 부부 중심의 가부장적 핵가족을 꾸리기 어렵다. 남성은 없는 능력에 가부장 노릇을 해야 하고, 여성은 돌봄 노동을 하는 한편 임금 노동도 해야만 한다. 이들은 계급 재생산의 핵심 고리인 문화자본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문화자본 없이도 단기간의 집중 노력으로 합격할 수 있는 9급 공무원을 선호한다. 주어진 삶을 당연시 여기다 보니 개인의 독자적인 시간을 구성할 수 없었고, 스스로 서사를 만들어 자신의 삶을 살아오지 못한다.

한편 그 지방대생의 부모들은 보수주의적 가족주의, 가부장제를 통한 성찰적 자신감, 그리고 가족주의적 습속을 보인다. 이들은 좋은 대인관계와 좋은 평판을 통해 가족이 득을 보길 바란다. 아버지들은 후회하지 않고, 자신은 열심히 했으며 집안의 가부장으로 살아온 인생에 만족한다. 어머니들은 자아를 종교 등에 투사하거나, 지향 가족에서 시작하여 생식 가족 안에서 완성되는(출산), 그리고 자녀가 성장하면 다시 돌봄노동(보육교사 등)을 통해 집 밖으로 나가는 행로를 걷는다. 무능한 가부장은 알려는 의지를 접고 가족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그 가부장의 아내는 남편의 부족한 경제력을 채우려 일터로 나가며 가족 밖의 세계에 대해 알려는 의지가 생겨난다. 이들의 관계는 가부장과의 관계를 통해 정의되며, 장남은 집안의 지원을 받으며, “삶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느끼”며 가부장이 될 준비를 하고, 차남 이하는 지원 없이 가부장이 되어야 하며, 딸들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차남 이하와 딸들은 이를 차별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부덕영은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해 보았기 때문에 안다. 평범한 목적을 세우고 살아가야지 과정도 좋고 결과도 좋다는 것을. 그건 가족 안에서 살아가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스물 세 살의 딸은 자꾸 대구를 벗어나 서울로 가려고 한다. 부덕영은 딸이 서울로 가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을 줄 ‘뻔히’ 안다. 여자가 어떻게 험한 서울에 가서 혼자 일을 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중략) 여자는 집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 집안에서 살던 방식대로 평범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들은 가족을 그 자체로 이상적인 공동체로 실체화하려 하며, 가족 밖 세상은 위험하니 알려 하지 않는다. 계층 상승의 욕망은 좌절되었으며, 평범하게 가족을 꾸려 살아가면 좋겠다는 바람은 자녀가 중산층 이상으로 살았으면 하는 소망과 같다. 이런 세대 유전은 지방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계급의 문제다. 가족 공동체는 적어도 지방에서는 아직 견고하며, 가부장적 모델은 여전히 잘 작동한다. 국가로부터 일방적 지시를 받고 살아온 부모 세대는 사회적인 것이 곧 가족적인 것으로 인식했으며, 집집마다 가부장이라는 이름의 “작은 박정희”의 권위에 눌려 살아왔다. 하지만 지역 경제가 불황을 겪고 부모에게서 자식으로의 자원 이동이 감소하면 청년 빈곤과 노인 빈곤이 쌍을 이루어 진행될 수 있고, 이와 같은 체제는 붕괴될 수 있다.

가족주의 언어와 선호의 언어가 단순히 ‘병치’되는 경우에는 가족의 행복도 추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하는 것 둘 다 가능하다. 나와 가족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책에서 “지방 여성”에 대해 별도의 항목을 두어 다루진 않았으나, 인터뷰와 군데군데 언급된 부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강력한 차별들이 엿보인다. 지방 출신들에게 주어지는 억압은 여성에게 더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순수하다는 것은 가족 밖 세상에 나가 세파에 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는 일을 해야 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 치더라도 여자는 순수를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되도록 집 안에 있어야 한다. (중략) 이러한 생각은 딸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다. “가끔씩 부모님은 내게 말한다. 우리가 없으면 넌 어쩌려고 그러니? 난 그 물음에 항상, 나도 그럼 죽을래! 라고 대답했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이 상상도 되지 않아서.”

저자는 지방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낮은 기대, 특히 딸의 행복은 능력있는 남편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애를 낳고 키우며 사는 것이라 굳게 믿는 ‘대구 경북의 마음’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이를 체화하고 내면화하여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게 된 여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안주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졸업 시기가 다가오자 친구들은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 토익을 공부하고 스펙을 쌓거나 글을 써서 문학상에 도전했다. 하지만 혜영은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 그냥 글 쓰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 친구라는 유사 가족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직접적으로 물었다. 혹시 글 쓴다고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하는 친말한 관계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한 전략 아닐까? 핑계 아닐까?

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고, 다시 가족주의로 돌아가는 이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가부장적 가족주의 언어에서는 여자에게 할당된 것은 간호사와 같이 남을 돌보는 노동을 하는 것이다. 여자 따위가 감히 글을 쓰며 탁월성을 추구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경택은 누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가부장적 가족주의 언어에 분노하고 절망했다. (중략) 가족을 떠나니 당장 생계가 막막했다. (중략) 지금의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제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잡고 가부장의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다.

물론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누나를 자살로 몰고 갔고, 이에 절망하여 가족을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면 가부장이 될 수 있다니 남자란 좋겠군, 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읽을 수록, 남자는 저 상황에서 가부장이 될 꿈이라도 가질 수 있지, 여자는 어떻게든 지방을 떠나는 것만이 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가부장이 되고자 하는 꿈”이 좌절된 남자가 여성 혐오로 돌아서는구나, 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옹호할 건덕지도 없는 일이지만, 시사인의 기사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 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언급된다. 일베는 “경상도에서 상경하여 자리잡은 가부장 아버지의 삶”을 거의 그대로 내면화하며, (‘김치녀’가 아닌) 좋은 여자친구를 만나 서울에 자리잡고 가족을 이루어 가부장이 되고자 하는 “평범한” 꿈을 미래상으로 갖고 있다. 앞서 나온 대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중산층 가부장의 이상을 이루고 싶다는 뜻이며, 지금으로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욕망이자, 이루기 지난한 욕망임에도. 이는 이와 같은 부분이 비단 지방 출신의 지방대 학생들 뿐 아니라, 지방 출신으로 상경한 가부장 아버지의 자식들에게도 이어지는 욕망과 갈등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 언급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자수성가한 지방 출신 아버지의 딸들인 나와 내 지인들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기실 저 환경에 반쯤 걸쳐야 했던 이들. 혹은 예전에 대학에서 일할 때 수없이 만났던, 지방에서 상경해서 서울에서 공부하면서도 수도권에 자리잡아 “다시는 그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던 아이들이나, 역시 지방 출신으로 서울로 취업하여 자리잡은 내 지인들도. (물론 이들이 탈출할 수 있었던 데는 성적이 큰 변수로 작용했겠으나,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딸은 지방대에 보내는 부모들은 아직도 많다는 점에서 이들은 운이 좋았다.) 한편으로 지금, 래디컬 페미니즘의 폭발이 90년대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지방 출신, 더 어린 세대에게 강력한 자극을 주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지방러”의 억압에 대해 생각하며, 여기에서 “가부장이 될 수 없는” 자들이 받는 억압의 수위가 더 높을 것을 생각하게 된다.

댓글

“복학왕의 사회학 – 최종렬, 오월의봄” 에 하나의 답글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