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유리

푸른 유리 – 오지혜, 서울문화사(마녀코믹스)

푸른 유리
푸른 유리

“푸른 유리”는 훌륭한 작품이다. “이건 대박이 날 수 있다”가 아니라 “이건 대작이 될 수 있다”로 분류해야 하는 만화.

일단 이 만화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한국에서 순정만화를 보고 자라 지금 만화 관련 일을 하고 있는 30대, 의 독서목록에서 빠지기 힘든 두 작품, “바람의 나라”와 “불의 검”을 연상하게 한다.

일단 배경이 낙랑이다. 주인공은 낙랑공주다. 이것만으로도 “바람의 나라”와 무관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지만, 이곳의 낙랑은 바람의 나라에서 보여지는 거대한 궁궐과 높은 성벽, 그리고 두 왕자로 대변되는 국가안보체계를 갖춘 국가로서의 “아름다운 나라”인 낙랑은 아니다. 그보다는 불의 검에서 볼 수 있는, 마리한을 수장으로 하는 부족국가를 연상하게 한다. 의복도, 주거도, 외교나 군사의 형태도.

아니, 이런 표면적인 모습만이 아니다. 두 만화를 감명깊게 읽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전율할 수 밖에 없을 만한 구석이 수도 없이 보인다.

오프닝에서 주인공인 낙랑의 막내공주 솔의 언니이자 낙랑왕의 수양딸인 란은 시집간 말갈 왕자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꽁꽁 묶인 채 연인의 죽음을 지켜본다. 연인의 가문은 몰살당한다. 그러나 란의 뱃속 아이는 연인의 아이도 아니다. 그것은 호색가인 둘째왕자의 아이였으며, 야심가인 셋째왕자가 권력의 방해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족을 없애기 위해 그녀를 이용한다. 낙랑왕 최리는 수십년 전 형제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왕위에 올랐고, 낙랑의 왕자들은 서로 목숨을 노리며 견제하는 한편, 혼사를 위해 공주로 들인 란을 강간하거나, 동생인 솔에게 한나라 사신들에게 노래를 부르고 웃음을 팔게 하며 성인식에 그들 손에 공주를 내어주려고 한다. 이 만화 속의 낙랑은, 그야말로 공주조차도 권력자들의 노리개가 될 만큼, 여성의 권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그뿐이 아니다. 란이 어릴때 구해주었던 노예소년 미루는 살갗이 희다는 이유로 순장 제물이 될 뻔 하며, 이후로도 불길한 존재로, 혹은 “하얀 저주”로 터부시된다. 낙랑이 아닌 다른 무리는 좀 나은가 하면, 말갈족 전사 자말타는 한 눈이 푸른 오드아이인데다 한족 출신으로, 대족장의 아들 마찬룬타의 부하이지만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란의 성인식날 밤 마침내 한 자리에 모이고, 함께 도망친다. 그리고 “호동 왕자”를 만난다.

말하자면 나와야 할 인물들이 다 나와 자리를 잡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오프닝인데, 이 오프닝까지 오는 데 네 권이 걸린다. 사실 당연한 것으로, 서사가 큰 이야기는 스타트도 어느정도 길 수 밖에 없다. 아직 본 이야기는 시작도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웹툰은 1, 2화에서 승부가 난다고 하고, 잡지연재 만화도 1, 2권 안에 승부가 나지 않으면 조기종결되는 경우가 허다한 마당에, 윙크 편집부에서 이 만화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지 엿보여지는 부분이다. 독자로서는 고마운 일이고.

호동왕자 이야기의 부수적인 요소이자 나라와 연인을 두고 갈등하던 비극의 히로인, 혹은 배신자의 아이콘인 낙랑공주는 “바람의 나라”에서 마침내 자기 이름과 자신의 서사를 얻었다. 그녀는 역사 속의 한 역할이자 아이콘에서 겨우 벗어나, 죽은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둘째오빠 운의 익애와, 그 사련을 경계했던 큰오빠 충의 견제 속에서 복잡하고 비극적인 가정사와 내면의 괴로움을 지닌 채 자라 혼사를 앞두고 두 나라의 비극에 휘말리는 구체적인 소녀, “사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사비의 결혼을 계기로 충과 운의 관계가 틀어지는 가운데, 고구려와 낙랑, 그리고 한과 말갈이 개입하며 마침내 뒤흔들리게 될 것이다.

반면 푸른 유리의 낙랑공주 “솔”은 비극적인 가정사와 내면의 괴로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불의 검”의 여성들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폭압적 운명, 주로 가부장적 운명에서 도망치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휘젓기 시작한다. 그녀가 처음에 미루를 데리고 말하는 전설 속에서, 낙랑의 여인은 하느님의 아들과 혼인하기 위해 토굴 속에서 인내하던 곰 부족의 여인이다. 곰 부족의 여인은 마침내 혼인을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 푸른 유리 조각을 손에 들고 있다. (아라비아산 푸른 유리 조각보다는 라피스라줄리일 것 같다.) 솔은 그렇게 자신도 스스로 보석이 되기를 꿈꾸지만, 셋째왕자의 학대를 받으머 천덕꾸러기처럼 지내며 그 감정을 거의 잊다시피 하다가, 성인식날 밤 이후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며 다시 그런 존재로 변해간다. 그녀는 여성(솔)이나 남들과 다른 모습(미루)을 지녔거나 다른 혈통(자말타)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 왕자들의 권력싸움 아래에서 희생되는 민중들의 모습들을 마음에 담으며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그녀가 푸른 유리를 쥐고 맞서려는 세계는 낙랑이라는 이름의 “정상 이데올로기의 가부장제”다. 그리고 그녀 앞에, 힘과 지략을 지닌 변수, 호동왕자가 등장한다. 하지만 호동은 “주류”라든가 “무휼”과 같은, 어디로 보아도 자기 아버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가명을 쓰며 돌아다닌다. 초반에 몰살당한 일가의 남은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약재상 “홍문”과 손을 잡고, 계속 새로운 정체를 드러내며 여유만만하게 굴고 있지만, 왕자인데도 피를 보지 못하는 성품의 그는 초조해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잡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가부장제에 종속적인 청년이다. 하지만 그는 솔이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그녀를 도구삼아 낙랑을 휘저을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솔에게 “유리”라는 새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에 긴 감상을 남길 수 없는 것은,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푸른 유리에 대해 남기는 감상들이 대부분 “이건 대작이다” 인 것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봐도 대작이 될 수 있는 만화인데 아직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어쨌든 21세기에 이렇게 스타트가 긴 만화를 볼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아무래도 드라마화 하기 좋은 이야기를 편애하는 듯 보였던 윙크 편집부가 이 작품을 밀어주고 있어서 특히 놀랍다. 노예 소년과 말갈 청년과 고구려 왕자 사이에서 비로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발로 걷기 시작한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계속 읽기 위해서라도, 정말로 작가님의 무병장수 만수무강과 돈길만 걸으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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