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실 수도 없고, 차를 마시러 갈 수도 없는 시각이었다. 무슨 급한 회의가 끼어있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오후 세시 반, 투표가 거의 다 진행되었을 무렵, 나는 화장품들을 넣어 다니는 주머니를 꺼내 회사 화장실로 갔다.
어차피 화장을 잘 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고 시간도 없으니 평소에는 출근할 때도 5분쯤 걸려서 화장을 했지만, 그때만은 정말 공을 들여서 한 10분쯤 두드려 발랐다. 아마 남들 담배 피우는 시간보다는 덜 걸렸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중요한 건 평소에는 연습으로밖에 바르지 않는 마스카라까지 발랐다는 것이다. 열심히 바르면서 생각했다. 부결이 되면 마스카라가 줄줄 흐르게 울겠군. 뭐라고 해야 할까. 그 순간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는데 달리 경의를 표할 방법이 없었다. 화장을 하고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엑셀을 들여다보며, 곁눈으로 유튜브 창을, 의원들을, 화면에 잡힌 세월호 유족들을, 그리고 세균맨…… 아니, 정세균 의장이 자리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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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주말에 선물할 것들을 사려고 오설록하고 러쉬에 들렀다. 러쉬에서 살 것을 사고 다른 비누 구경을 잠깐 하다가, “오늘 정말 좋은 날이에요.”라고 했더니 직원이 “탄핵! 탄핵 말씀이시죠!”하면서 다가왔다. 세월호부터 백남기님, 그리고 오늘 탄핵까지, 이야기들을 짧게 주거니 받거니 했다.
집에 오는 동안, 난임치료를 받고 꼬꼬마를 임신하고 낳아서 지금까지 키우는 내내 고민하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난임치료를 받던 중 세월호 사고가 났고, 임신 3개월 무렵 신해철님은 의료사고로 타계하셨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록 세월호는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무슨 화염병이나 각목을 든 것도 아닌 노인이 물대포에 맞았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강남역 번화가에서 평범하게 데이트를 하던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이렇게 안전하지 못한 세계, 이렇게 불의한 세계에서 나는 아이를 낳아도 되는 것일까, 라는 고민을 계속했다. 가끔은 무책임할 정도로 자신이 없어졌다. 87년 이후로 우리가 유의미한 승리의 경험을 본 적이 있었나? 그 87년에 나는 국민학생이었고, 집에서도 학교 선생님도 “데모하는 빨갱이 대학생들”을 욕하는 말을 들었으니, 그게 승리였다는 것을 나는 중학교 3학년은 되어서야 제대로 알았다. 나의 세대가 포함된 승리의 기록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4.19에서 87까지 약 30년이 걸렸다는 것을.
87에서 2016년 겨울까지도, 약 30년이다. 우연이겠지만, 어쩌면 이런 승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한 세대의 한 번 정도 일어나며, 그것이 다음 세대의 성장기까지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대규모의 승리가 필요한 일이 몇년마다 일어나면 그것도 큰 일이고. ㅇㅇ 나는, 집에 돌아가다가 그야말로 마스카라가 번지는 줄도 모르고 길에서 울었다. 이 일을 위해 투쟁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당분간은 조금 혼란스럽겠지만, 이 혼란이 지나면 적어도, 어제보다는 안전한 세계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세는 흥미롭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좋은 세상이란 결국 평등한 기회와 공정함이 전제된 안전한 세계 쪽이다. 무엇보다도, 그때 나름 배운분들인 학교 선생님들조차도 그 가치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그 87년과 달리, 지금은 정말로 국민의 최소 80% 이상, 넉넉잡아 96%가 이 탄핵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있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남았지만, 우리의 세계는 적어도 조금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가 드는 밤이다. 다만 87년처럼, 죽 쒀서 개를 주는 불상사만 없기를 바랄 뿐이지만.
ps) 그건 그렇고 더불어민주당의 추미애 당대표는 자기 손으로 두 번이나(첫번째는 자기 뜻만은 아니었으나, 여튼 그 상황에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 탄핵을 가결시켰군. 세계 정치사에도 이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러다가 미국에서 트럼프를 탄핵하기 위해 추미애 의원을 수출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까 몰라. (웃음)
ps2) 이럴때 “리베르떼”를 영업해야 하는데 (웃음) 아니, 농담 아니고요, 세월호 그 해 여름부터 써서 얼마 전에 완결 난 혁명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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