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 – 박정자, 기파랑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는 2009년 뉴데일리에 연재되었던 노마드 강의를 묶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과정을 통해 일상적 사건이나 현상들, 우리 주변에서 미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들을 혼합재료 삼아, 푸코, 보드리야르, 데리다 등의 철학으로 그 재료 위에 색을 입히는, 일종의 아상블라주를 시도하였다고 언급한다. 이런 시의성과 인문학적 사유의 결합은 대중에게 인문학적, 특히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내용을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할 수는 있겠으나, 저자가 언급한 대로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지며, 한 시점의 역사성이 인문학적 관점에 덧붙여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2016년 현재, 독자는 2009년 저자가 발견했던 여러 현상들과 사건들의 달라진 점을 찾거나, 더 좋은 예를 생각하며 읽을 수 있다. 독서 과정 자체가 과거와 현재의 만남인 셈이다.

이 책에는 여러 인문학적 지식들을 독자에게 쉽게 다가서게 하기 위한 많은 장치들이 존재하나, 그만큼 여러 문제점 또한 발견된다. 본 과제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감안하며, 동시에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발견되는 문제점들을 논하고자 한다.

“마이클 잭슨”에서 저자는 “철저한 상업주의야말로 인간을 고귀한 자아실현의 단계로 상승시킨다”고 생각함을 밝히며, “미국 문화의 특성이기도 한 상업주의는 한 사람의 생 자체를 파괴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 실천의 질을 극대화한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이미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의 경계가 무너진 지는 오래 되었다. 컬러 만화를 확대하여 캔버스에 옮긴 로이 리히텐슈타인, 캠벨 수프와 같은 상업적인 모티프를 적극 활용하였으며, 광고를 찍거나 로고를 만들기도 했던 앤디 워홀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미 지난 시대의 영웅들이다. 대중소설가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가 노벨상 후보로 언급되기까지 하는 시대에, “순수예술과 대중문화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순수 미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며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런 순교자적 표상이 천박한 물질적 욕심이라고 매도되는 상업주의에서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낡은 것은 아닐까?

또한 마이클 잭슨의 분칠한 얼굴에 대해 “백인선망”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망자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한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마이클 잭슨은 멜라닌 세포의 파괴로 인해 피부가 탈색되는 백반증에 걸려 있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그의 디자이너, 그의 피부과 의사 등이 수차례 증언한 바 있다. 빌리지보이스에 수록된 제프 매켄지의 “Why king of pop”이라는 기사에서는 “백반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지나친 모함으로 그를 깍아내리려고 하는것은 정말 잔인하다. 치명적인 병에 걸리지 않았을 뿐 그 또한 그 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중요한것은 우리들 모두 아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한 그의 노력을 괴물처럼 묘사하면서 조롱하는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지하고 잔인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의 서사구조 분석”에서, 전반적으로 최초의 상태와 최후의 상태가 서로 전복되는 서사적 도정의 익숙함에 대해 말하던 저자는 결론에서, 갑자기 재벌가의 아들과 가난한 집 딸의 결혼 스토리를 “재벌에 대한 강력한 선망”과 “부와 명성을 거머쥔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채울 길 없는 욕망”으로 치부하며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처럼 집요하게 신데렐라 판타지로 도피하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바로 직전까지 저자가 설명하던 내용을 그 자리에서 뒤엎는 결론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프의 31가지 민담 원형에서도 “영웅(주인공)은 결혼하여 왕좌를 얻는다”는 내용이 있다. 조셉 캠밸의 영웅의 여정에서, 영웅은 결국 다른 모습이 되고 영약을 얻어 귀환한다. 이는 “영웅이 무언가를 이루려 하나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영웅은 그것을 이루고 보상을 받는다”고 요약할 수 있다. 영웅(여성 주인공)이 이루려 하는 것은 사랑이요, 상태의 전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민담구조에 가까운 드라마의 반복과 재생산을 두고 단순히 “재벌에 대한 선망”이나 “채울 길 없는 욕망”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혹 이것은, 현재 상황의 전복을 바라지 않는 저자의 바람이 투영된 것은 아닐까?

“성기 노출이 숭고?” 챕터에서, “‘미워도 다시 한번’의 서사구조 분석”에서도 느꼈던 불편함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저자는 24부작 드라마에서 불과 6편만을 보았고, 영화 “박쥐”는 신문기사만 본 채로 이와 같은 글을 쓰고 있다.

“질병의 정치학”에서 저자는 푸코가 생체 권력에 대해 비판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만, 동시에 “전 국민 의료보험의 적용으로(중략) 무조건 권력을 나쁘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저자가 푸코에 대해 독자가 오독할 수 있도록 잘못 기술했다고 생각한다. 푸코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군주의 생사여탈권은 백성을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둘 권리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개입으로 이 권력의 상징은 정 반대로 바뀌었다.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리로 말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생체권력의 핵심은 “어떤 생명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둘 것인지를 관리”하는 데 있다. 만약 전 국민 의료보험에서, 인종이나 성별, 나이, 계층, 계급, 자본에 따라 차별적인 혜택을 주고 있다면, 이는 차별화 기제로서의 생체권력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저자가 언급한대로 우리나라의 국가 의료보험은 “전 국민 의료보험”이고, 공보험이며, 가급적 더 많은 이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복지”다. 저자는 이를 생체권력과 한 카테고리로 일방적으로 묶어 생체권력을 옹호하는 데 쓰고 있다.

“아우라 이야기”, “시뮬라르크의 시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아닌 예술 안에서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이해하기 쉽고 공정한 시선으로 저술하는 저자가, 사회적 현상만 나타나면 결론에서 자신이 설명한 바를 뒤집으며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기술한다. 앞서 언급한 항목들에서 저자는 상업예술이 순수예술보다 하등하다고 주장하고, 난치병을 앓아 온 환자를 모욕했으며, 민중을 채울 길 없는 욕망의 노예로 여겼으며, 심지어 푸코에 대해 독자가 오독할 여지를 남기면서까지 복지와 생체권력을 고의로 호도시켜 생체권력을 옹호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저자의 성향은 “노무현 신화 만들기” 챕터에서 최악으로 치닫는다. 저자는 한 챕터 내내 고인에 대한, 당시로서는 확정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로 밀어붙인다. 이 의혹 중 적잖은 부분이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학술서적으로서 신중치 못한 태도임은 분명하다. 또한 저자는 전직 대통령을 지낸 고인의 장례 경비를 두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비교대상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선거가 아닌 대통령 유고로 인한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이 된 최규하 전 대통령과 비교하기에는 장례에 모인 인원도, 그 위상도 다른 상황에서 단순 비교를 하는 우를 범하고 있으며, 물가상승률조차 반영하지 않았다. 이는, 이 책이 나올 당시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일간베스트” 등에서 “팩트”를 제시한다며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사실들을 단순 비교하며 상대를 공격하는 방식과 유사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이 챕터 내내 시종일관 노무현 신화에 대해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며, 그 죽음에 뒤따르는 각종 현상들을 감정적 태도라 비난하였는데, “노란색 원복을 입고 줄지어 가는 유치원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귀여웠는데 그 노란색을 더 이상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언급한 저자가 과연 지금의 세월호 사태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은 마지막 챕터, “데리다 이야기”다. 해체주의적인 관점에서의 미술, 건축, 패션 등을 언급하고, 데리다의 “해체”가 “소크라테스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서유럽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 철학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릴 것을 주장하는 방법적 실천”이라고 설명한다. 다양한 단어의 개념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이해하는 데는 부족하다 싶다. 또한 지금까지 소개했던 “대중문화”와는 다소 궤를 달리하는 사례들이 등장한다. 필요한 이야기지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이 책 자체가 언론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묶은 것이기 때문이리라고 본다.

이 책은 많은 내용을, 굉장히 새로운 개념을 다루는 것처럼 소개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사례들도 21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소개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레트로 마니아”의 저자이자 음악평론가인 사이먼 레이놀즈는 “알고 보니 21세기 첫 10년은 미래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라 ‘재(re-)’시대였다. 끝없는 재탕과 재발매, 재가공, 재연의 시대이자 끝없는 재조명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지금, 21세기 첫 10년은 음악부터 미술, 패션, 뉴미디어에 이르기까지 과거를 재탕하고 고갈시키며 10년을 보내왔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과거와 현재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으며,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이 뒤섞인 채 전위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패스티시로 변해왔다. 대중문화에 만연했던 20년 주기 복고 경향도 사라진 지 오래이며, 심지어 2000년대가 지나기도 전에 2000년대가 복고로서 소비되는 21세기의 첫 10년과 같이, 이 책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윤리와 과거의 잣대로 가까운 과거들을 파헤칠 뿐이며, 여기에 지리적인 특성과 이 내용이 연재된 매체의 특성이 더해지며 그 이념이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의심을 갖게 한다.

지난 20세기의 초반은 여전히 19세기에 매여 있는 빅토리안 – 에드워디안의 연장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세계는 마침내 20세기로 넘어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21세기도 마찬가지다. 초반부는 지난 세기의 연장이며, 어떤 계기를 통해 21세기로 넘어갈 것이다. 이와 같은 시대에, 과연 이 책은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 초반 10년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가. 미학 이론에 대한 설명은 짧고, 이념은 편중되었으며, 예시는 적절치 않았다. 이번 학기의 전반부에서, “문학예술론” 강의를 통해 문학에서, 예술에서, 현실에서의 “눈”과 “시선”에 대해 공부하고 계속 생각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의도적으로 편향된 정보를 제시하기 위해 왜곡된 시선”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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