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을 통해 본 두 가지 실명 모티프 – 육체의 눈과 정신의 눈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는 두 명의 눈 먼 자가 나온다. 하나는 정신의 눈이 멀어버린 리어 왕이요, 다른 하나는 육체의 눈이 멀어버린 글로스터 경이다.

리어 왕은 달콤한 말에 속아 코딜리어의 말이 담은 진심을 보지 못한다. 켄트 백작은 어리석음으로 눈이 먼 리어 왕에게 “잘 보십시오, 폐하. 제가 폐하 곁에 남아 폐하 시선의 표적이 되게 해 주십시오.” [ref]윌리엄 셰익스피어, 김태원 역, “리어 왕”,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4. 20쪽(1막 1장)[/ref]라고 말하나 리어 왕은 켄트 백작마저 내친다. 결국 그는 딸들에게 구박받고 모든 권력을 잃은 채, “늙고 어리석은 눈아!” [ref]위의 책. 58쪽(1막 4장)[/ref]라고 스스로 탄식하고, 광대와, 카이어스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채 돌아온 충신 켄트 백작만을 데리고 광야를 떠돌며 미쳐버린다.

글로스터 백작은 서자 에드먼드의 계략에 속아 적자인 에드거를 내치고 만다. 글로스터 백작은 리어 왕을 구하려 하나, 3막 7장에서 그는 에드먼드의 밀고로 인해 붙잡혀 눈이 뽑힌다. 눈이 먼 채 쫓겨난 글로스터 경을 구하는 사람은 거지 ‘불쌍한 톰’으로 위장한 에드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13장에서 사회적인 존경과 개인적 영화를 누리다가 하마르티아(harmartia)로 인해 전락한 인물이야말로 비극의 플롯에 적합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두란노 판 온라인 비전성경사전의 죄(sin) 항목에서는 ‘하마르티아’는 히브리어 ‘하타’의 의미와 거의 흡사한 단어로 ‘표적을 맞히지 못함’을 뜻하며,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한 잘못을 의미한다고 언급한다. 이는 “활은 충분히 휘어지고 당겨졌다. 이제 과녁을 맞혀라.” [ref]위의 책. 18쪽(1막 1장)[/ref]라고 말했으나 익애에 눈이 멀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올바르게 상황을 볼 수 있었던 켄트 백작을 내쳤던 리어 왕의 행보와 겹쳐진다. 다시 말해 “리어 왕”에서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는 판단의 오류로 인하여 행위와 그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지며 행위자가 몰락하고 희생되는, 그리스 비극의 근본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가 ‘가장 으뜸가는 자’에서 가장 저주받은 자‘로 전락하였듯이, 리어 왕은 딸들의 달콤한 말에 눈이 멀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로 몰락한다. 그는 몰락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통을 받아들이다가 마침내 미쳐버린다. 그는 광기로 인해 정신의 눈이 멀었으나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광기 속에 이성이 있어” [ref]위의 책, 191쪽(4막 6장)[/ref] 진실들을 꿰뚫어보게 된다.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광야를 떠도는 모습은 오이디푸스와 같이, 자신의 고통을 자신만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존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지 않으려는 의지다. 코딜리어의 귀환으로 그는 구원의 실마리를 찾으나, 결국 코딜리어도 교살당한다. 리어 왕은 파멸하였으나 패배를 인정하진 않았으며 마침내 고통속에 죽는다.

리어 왕의 충신이었던 글로스터 백작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눈이 먼 뒤에야 서자인 에드먼드가 자신을 배반하였고, 자신이 내친 아들 에드거가 옳았음을 깨닫는다. 그는 “사랑하는 에드거, 속임수에 빠진 아비에게 분노의 제물이 되었구나. 살아서 다시 너를 만져 볼 수만 있다면 다시 눈을 찾았노라 말할 텐데.” [ref]위의 책. 158쪽(4막 1장)[/ref]라 말하며 탄식하지만, 그는 에드거가 불쌍한 톰이라는 가명을 쓰고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데도 알아보지 못한 채 절망한다. 글로스터 백작은 극의 후반부 내내 “고결한 에드거라면 반드시 억압해야만 하는 자식으로서의 공격성” [ref]조지 헌터 외, 강석주 외 역, “4대 비극의 탄생과 숨겨진 의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4, 171쪽[/ref]과 “에드거의 두려움” [ref]위의 책. 172쪽[/ref]을 의미하는 불쌍한 톰의 의지대로 이끌려다니다, 마지막에 리어 왕은 죽고, 불쌍한 톰이 에드거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아 죽음에 이른다.

“리어 왕”에서 리어 왕 켄트 백작, 글로스터 백작과 에드거의 관계와 몰락은 서로 대구를 이룬다. 교활한 말에 속아 진실한 이들을 내친 대가로, 한 쪽은 광기로 인해 정신의 눈이, 다른 쪽은 육체의 눈이 멀어버린다. 마침내 두 사람이 광야에서 만나고, 리어 왕은 “나의 불행을 위해 울어준다면 내 눈을 가져도 좋다. 너를 잘 안다, 네 이름은 글로스터다.” [ref]윌리엄 셰익스피어, 김태원 역, “리어 왕”,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4. 191쪽(4막 6장)[/ref]하고 말하며, 육체적 실명과 정신적 실명 모티프는 겹쳐지고, 두 사람은 ‘시선의 표적’, 즉 하마르티아를 극복할 바른 판단에 해당하는 켄트 백작과, 리어 왕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과 학대, 그리고 코딜리어의 표현되지 않은 원망이 겹쳐진 에드거와 함께 움직이며, 코딜리어와의 해후를 통해 구원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러나 이 모든 비극의 희생자이자 구원자의 포지션을 지녔으며, 적법한 왕위 계승자인 코딜리어는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살해당한다. 리어 왕은 켄트와 에드거에게 “내 영혼의 친구인 두 사람, 이 왕국을 다스리며 피투성이의 나라를 지켜주시오” [ref]위의 책. 239쪽(5막 3장)[/ref]라고 말하며 숨을 거둔다. 이는 리어 왕이 처절한 고통 속에 얻은 지혜를 의미한다. 켄트는 리어 왕에게는 타인의 눈이었으나, 결말에서 켄트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되찾은 ‘나’의 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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