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그러지는 사람들

전에 언젠가, 인간은 대략 30~35살이 넘어가면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본 적이 있었다. 책에서 본 말은 아니고, 이글루스 블로그 어디선가 본 말 같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젊었을 때 듣던 음악을 듣고, 어릴 때 먹던 음식을 찾고, 20대 때 까지 쌓아온 지식으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려 든다. 새로운 것이 눈 앞에 놓여 있어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야, 했는데,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 “약간의 귀찮음”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들을 몇 번 맞닥뜨렸다. 그리고 정말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대여명은 물론이고 평균수명 자체가 이렇게 올라갔는데, 20대 때 까지 접했던 세상으로 남은 평생을 살아가는 건 무리다. 한 40대 초반에 모든 사람에게 2년정도 재충전의 시간이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 1년간은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을 빠르게 복습하고, 나머지 1년은 고등학교 졸업한 뒤 20년동안 업데이트 된 것들을 좀 배울 수 있다면. 그 짬짜미 악기도 하나쯤 배울 수 있으면 더 좋고. 하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 그런 일이 이 한반도에서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 자력갱생, 아니, 셀프 업데이트하는 수 밖에.
몇년 전 부터 게시판에 긴 글이 올라오면 3줄 요약 부탁한다는 말이 으레 따라붙었다. 심지어는 블로그에다가 글을 써도 “잘 읽었는데 요약 부탁한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왜, 소설 연재분에도 3줄요약 해달라고 하지 ㅋㅋㅋ 하고 생각했는데, 이젠 누가 웹툰을 그려도 3줄요약 이야기를 하는 자도 있는 모양이다. 읽고 생각하고 요약하는 기능 자체가 퇴화되어버리기라도 한 것 처럼. 학교 다닐 때, 문학 시간에 논술 대비로 신문 사설을 읽고 요약하는 수업을 받으면서 대체 왜 우리는 배우라는 문학은 안 배우고 신문 사설 요약이나 하고 있는가 투덜거린 적이 있는데, 지금은 학교에서 그 조차도 안 하는 것인가 싶어 막막하기도 하다. 오늘 알파고에 대한 이세돌 사범의 첫 승리에 부쳐 한국 기자들이 줄줄이 던졌다는 질문들을 보면서, 이제는 기자들도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줄을 모르게 된 것인가 싶어 한심하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인간 중 가장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을 내리 세 판 이겼다고 해서 인류가 종말을 맞거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기를 멈춘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이라니, 이건 확실한 종말의 징조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쪽이 더 걱정스럽다. 알파고의 후손들인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지배하겠다고 나서기 전에, 인간이 알아서 노예로 박박 기어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20대 때 까지 쌓아온 데이터로 80세까지 업데이트 없이 살아가면서 뭐든 세줄 요약 부탁하는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을 상상하니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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