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진짜같아 보이게 만드는 것

전에 월하의 동사무소 쓸 때 누군가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현대 배경의 판타지를 “있어보이게”쓰려면 역시 현실에 기반한 부분은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게 써 줘야 한다고. 그냥 환상성만 들이부은 사상누각은 재미가 없다. 그 세계가, 제대로 닫혀 있질 않고 뭔가 줄줄 새는 느낌이 드니까.

그 생각을 다시 떠올린 것은 오늘, 아랫니가 올라오기 시작해서 끙끙 앓는 꼬꼬마를 어깨에 들쳐메고 달래면서 손에는 스마트폰을 들고, 지난 세기말에 나왔던 델파이 5에서 돌아가는 테트리스 소스를 눈으로 따라가는 짓을 하던 중의 일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PermIT!!!에서, 학생들이 예전에 델파이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에 갑자기 에러가 발생해서 허둥거리는 장면을 넣어야 하는데, 그 부분 때문에 그걸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 소스를 다 보고 공부한다 한들, 실제로 만화 컷에 이 소스가 나오진 않는단 말이지. 나온다 하더라도 모니터 비춰주는 컷에서 글자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아주 작게 나오고 말 거다. 그러니 이건 사실 시간낭비다. 애를 달래는 데 집중하든가, 차라리 애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독자 눈에 안 보여도 내가 모르면, 결정적으로 “있어보이지” 않으니까. 작가가 모르는 상태로 써 버리면 어느 구석에서 가짜 티가 확 나고 만다. 그게 문제다. 현대물은 그게 어렵다. 차라리 아예 없는 세상을 그려버리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이렇게 뒤지고 있어야 하니. 여튼 그런 고민을 해 놓고도 나는, 세이가 돌아오자 세이에게 아기를 넘겨놓고는 수십 년, 아니, 십수 년 전에 있었던 제 2회, 3회 리눅스 공동체 세미나 관련 사진자료를 뒤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그때 사람들이 입었던 티셔츠는 너무 허여멀겋기만 해서, 만화에 그대로 들어가면 단체로 속옷 바람에 세미나 한 것 같고 예쁘지 않을 거다. 티셔츠 색과 배너 색이 달라질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때의 세미나 자료나 사진 자료를 찾아보지 않고 쓰면 분명히 어디선가 동티가 나고 말 테니까 별 수 없지. 별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현대물을 쓰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쩐지 이런 면에서는 스스로 재앙을 불러오는 타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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