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서 맨발의 겐

나의 유서 맨발의 겐 – 나카자와 케이지, 아름드리미디어

만화 “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의 반핵 수기.

처음 “맨발의 겐”을 읽었을 때는, “반딧불의 묘”를 몇 번째인가 봤을 때 처럼 불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혼란스러웠다. 쓰보이 사카에의 “스물 네 개의 눈동자”에 대한 혼란과도 비슷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반전을 말하고 평화를 말하고 있는데 정작 이웃나라를 침략한 건 너희였잖아. 같은 것. 물론 어린아이들에게 그 전쟁의 죄를 묻는 것은 무리지만, 어른에 대해서도 가엾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가, 그런 것이 특히. 하지만 이 점에서 맨발의 겐은, 반딧불의 묘나 스물 네 개의 눈동자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전쟁 때문에 아이들이 가엾은 피해자가 되어 죽었다거나, 시골 마을에서 천진하게 자랐던 아이들이 전쟁을 거치며 변하고, 많은 것을 잃고, 그러면서도 살아가더라는 “안전한” 길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맨발의 겐은 반전을 넘어, 인물들의 입을 빌어 직접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천황을 비난하고, 천황제를 반대하고, 조선인이나 다른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비판한다. 이 만화가 나온 것이 1970년대 초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부분에 있어 작가는 우익들의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그려 나갔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일본이 우경화되며 나카자와 케이지 선생 사망 이후 몇몇 지자체에서 학생들에게 맨발의 겐을 열람 제한 하도록 조치했다고 들었고.)

그리고 이 수기를 읽었다. 작가가 실제 겪었던 원폭, 만화에서 보고 놀랐던 것 이상으로 참혹했던 그날의 실상들. 여기에 현재의 후쿠시마 원전과, 노후화된 고리 원전과, 바로 그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했던 이우 왕손에 대해서까지 두루두루 떠올리면서. 동시에, 리얼 클로즈 마지막 권에서 진보 미키 부장이 “그 해에 나는 스리마을 섬의 원전사고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내 아이를 안고 있었으니까.”하던 구절도 떠올렸다. 마침 나도, 내 아이를 안고 있는 채로.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인인데 원폭에 맞았어요 흑흑” 같은 헛소리가 아니라, 인간을 전쟁으로 내몰았던 천황제 자체에, 그리고 민간인들의 머리 위에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에 대해 함께 비난하고, “전쟁때문에 일본인(높은 사람들)은 몹쓸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전제한 뒤, 그들로 인해 고통받은 평범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의 고통을 보여준 이 만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작가가 무엇과 싸워 나갔는지를 생각했다. “밟혀도 밟혀고 늠름하게 싹 트는 보리가 되어라”는 말은, 일본 아이들에게만 힘을 내라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 시대에 짓밟힌 모든 사람들을 위해 외치는 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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