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 덕질상, 영화를 이것저것 보는편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영화 한 편을 여러 번 보기란 쉽지 않다. 일단 시간이 부족하니까. 그러니 대개는 한 번, 많게는 두번이나 세 번까지 보면서 그 안에 뽑을 뽕을 다 뽑아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시간낭비다 싶은 영화는 딱 질색이다. 실화를 소재로 했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흘러서 이도저도 아니게 되는 영화에 대고는 때로는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하기도 한다.
사실 송강호의 영화란, 대개 믿고 볼 수 있는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다. 대본이나 연출만 분리해서 생각하면 그냥 범작이었다 해도 송강호라는 배우가 영화 자체를 살려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다행히도, 많은 훌륭한 배우들이 종종 망작을 택해서 팬조차도 두세 번 다시 보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삽질을 하는 반면, 송강호는 범작 이하의 영화를 택한 일도 없었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송강호의 영화를 봐서 실망한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타임라인에 종종 비교 거론되던 다른 영화가 거슬렸을 뿐이었다. 거, 뭐라고 해야 하나. 중년노빠깨시;; 로 분류되는 양반들이 이 영화를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에 비유하고 있었던 것. 사실은 그래서, 원래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개봉 첫 날 어떻게든 보려고 했던 이 영화를, 몸이 어느정도 회복될 때 까지 미뤘다가 보게 되었다. 실제로 내 몸이 두시간동안 얌전히 영화만 볼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던 것도 아니기도 했는데, 그 상태로 영화 보러 갔다가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같은 걸 보고 온다면 정말 흉폭해질 것 같아서였다.
부러진 화살의 경우는…… 교수가 판사를 공격한 것도 사실, 그가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한 욕설과 부적절한 언행은 물론 재판과정에서 판사모독에 법정 출석도 안 했던 것도 사실인 것을 뭔가 굳이 사법부에 대한 강렬한 원한을 담아 저렇게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나 싶어서,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현실 사건과의 괴리가 너무 대단해서 한심할 지경이었고. 그렇다. 안성기님이 왜 저기 출연하셔서 저 헛소리에 설득력을 실어주시는가 싶을 정도여서 황당했다. 남영동의 경우는 김근태님과 그분의 투쟁, 혹은 고문, 그 당시의 남영동 대공분실 등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영화관에 걸릴 정도의 수위로 약화시킨 고문 포르노”급이라, 사실 외부 지식이 없이 영화 자체만 본다면 패고 패고 패고 또 패고 물에 집어넣기를 반복하는(…..) 내용만 끝없이 나오지 않던가. 아무리 실화에 기반한 극이라 하더라도 저렇게까지 “실화를 모르고 보면 그냥 고문 포르노 필름”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영화로서는 가치가 없는게 아닌가 싶어 좋아하지 않았다. 여튼, 중년노빠깨시(……386으로, 마치 영감님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핥고 칭송하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핥고 칭송하며 그를 순교자로 만들기를 즐겨 하며, 트위터에서 수동RT하면서 뭐 쓸만한 내용도 없이 “아!”같은 감탄사만 적고 있는 주제에 자기들이야말로 깨어있는 시민들의 전형적인 표상이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세대는 무식하고 맹목적으로 박통을 따르고 자기보다 어린 세대는 사회문제에 관심도 없는 골빈 것들이라 착각하는, 아직도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인 줄 착각하는 입만 산 어르신들 말입니다.)여러분이 이 영화를, 그 영화들에 비교하며 추천하는 것을 보니 무서웠다. 솔직히. 그리고 오늘에야 이 영화를 보고 왔다.
이야기의 실질적인 시작은 사실 “송우석 변호사가 국밥집 아줌마를 다시 만났고, 돈을 갈퀴로 벌어들이고 있었다”지만, 영화는 그 앞에 다른 시퀀스를 보여준다. “판사 그만두고 왔다. 돈은 없다. 하지만 이제 다른 변호사들이 (아마도 품위상) 안 하는 일을 해서 돈을 벌겠다”며 찌라시 돌리듯 명함을 돌리고, 쥐가 뛰놀고 물이 종종 안 나오는 집에 돈을 푸대에 담아 가져오다가 그는 문득, “아파트로 이사가자”고 말한다. 7년 전, 사법고시 준비를 포기하고 책도 팔아버린 채 막노동을 하던 그는 갓 태어난 아들의 얼굴을 보고, 팔았던 책을 다시 사기 위해 국밥집에서 돈을 안 내고 도망친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지었던, 미장하다가 시멘트 벽에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새겨놓았던 그 집에, 7년 뒤 잘 나가는 변호사가 되어 이사한다. 그 다음에야 국밥집 아줌마를 다시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그 이후는 “사법서사의 분야인 등기까지 하면서 돈을 갈퀴로 벌어들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던 송우석이라는 세무 전문 변호사가, 국밥집 아줌마의 아들 진우가 실종되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쓰고 잡혀들어갔고, 고문을 당한 것을 목격하며 변호를 맡고, 그 과정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투사가 되는 과정”이다. 어찌 보면 뻔한 “영웅담 구조”다. 실화에 기반했고, 실화 기반 아니었다면 너무 뻔해서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던 이 영화를 살리는 부분이 뜻밖에도 이, 국밥집 아줌마와 재회하기 전까지의 앞부분이다.
“사법고시 공부를 하다가 아이가 태어났다. 너무 가난해서 아내 출산비용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고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난 아들을 보고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팔았던 책을 다시 찾아와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다. 상고 출신이라는 학벌 컴플렉스에 가난 컴플렉스가 겹쳐 나이트 삐끼처럼 명함을 돌리고 돈 잘 버는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중산층’의 상징이자 한때 자신이 막노동으로 돈을 벌 때 지었던 아파트에 입주한다.”는, 이 내용은, 주인공의 백그라운드를 풍성하게 해 줄 뿐더러, 이 사람이 처음에 지키고 싶었으며, 결국 “자기 신념대로 살기 위해” 버리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관객이 제대로 상기하지 않을지라도, 잠을 청하던 아내가 “이 사건 꼭 해야 하느냐”고 묻는 장면에서, 슬며시 관객을 뜨끔하게 만드는 장치다. 이후의 실로 정석적인 전개와 맞물리며, 구성적으로 아주 안정적인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부분이다.
안정적인 만큼, 뻔하고 공식에 가까운 부분들이 많았다. 실화에 기반하지 않았으면 지루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 부분이다. 이 영화를 살린 것은, 현실이 3할이요 송강호라는 배우의 힘이 7할이었다. 특히 이미 짤방과 동영상 클립으로도 유명한 차경감과의 대결(……)은, 그야말로 신이 들린 듯 했다. 처음의 속물적이고 가벼우며 돈이나 잘 벌고 내 가족과 행복하면 된다는, 중산층을 지향하는 이기주의적 소시민의 전형적인 모습이 눈에 핏발이 서고 눈물이 차오른 채 “국가는 국민입니다”를 외치는 히어로로 바뀌는 과정은, 배우 스스로의 표정이 표현하는 약간의 갈등, 그리고 역시 소시민적인 그의 사무장과 아내가 보이는 우려만이 존재할 뿐, 그 내면과 행동만은 무모할정도로 확신과 의지로 가득차 있었다. 이 영화가 시시껄렁한 최루성 영화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기자인 친구와 셔츠 바꿔입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뭉클함을 주기 위한 밑밥”으로 쓰인건 알겠는데 과잉이다 싶긴 했다. 그래도 뭐. 음.
그 다섯번에 걸친 공판 장면 이후, 87년 박종철 추모회가 열리고, 송우석 변호사는 앞장을 선다. 최루탄이 발사되어도 물러서지 않던 송변호사는 전경들이 달려오자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노태우 퇴진이라는 띠를 두르고 전경들에 맞서던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대놓고 오마주한 이 장면에서는 나도 조금 울컥하긴 했다. 이후 99명의 변호사가 그를 변호하기 위해 연대하는 장면은 대우조선 사건 때일텐데, 이때 주인공이 입고 있는 미결수복에 적힌 번호가 33이다. 이쯤 되면 대놓고 오마주하자는 거지요. (먼산)
그건 그렇고 99명 변호사의 이름을 판사가 낭독하는데 검사의 표정이 순간 쫄아드는 게 약간 웃음 포인트. 그것 말고도, 중간에 양심선언을 했던 윤 중위(군의관.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주인공은 짜장면 배달부로 변장하고 성당으로 달려가 그를 만났다)가 졸지에 휴가가 취소당하고 탈영병이 되어 끌려가는 장면을 보면서 걱정했는데 돌아와서 검색하보니 그 사람은 다행히 작중인물이었다고 하고. 그리고 국밥집 아줌마네 아들, 부산공대 다니는 진우라는 청년이 잘생겼네 + 고문당하는 연기 잘 하네 싶었는데 뜻밖에 아이돌 가수라고 해서 좀 놀랐다.
중간에 세금 문제 상담하러 오는 재벌 2세가 말하는 민주주의가 한없이 자본주의적인 미국식 민주주의인데 현실과 유리되어 나이브한 것에 잠시 쓴웃음을 짓다가, “그래, 그리고 그때에 비해 지금 국민소득이 세 배가 뭐야. 그보다 훨씬 더 늘어났는데 말이지.”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떤 면에서, 나를 포함해서, 심지어는 8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조차도, 체화된 공포를 조금씩은 다 갖고 있기 때문일까. 당장 나만 해도, 86년, 87년에 뉴스에서 신문에서 매일 시위 장면 내보낼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저건 나쁜 것”이라고 듣고 배우고 심지어는 질문했다가도 “그런 것 물어보면 잡혀간다”는 대답도 들은 적 있는걸. 그런 점에서, (한 열흘 쯤 전에 내가 이제 한물 간 세대가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87년도 이후에 태어났고, 5년 전에는 촛불문화제 쫓아다니던 고등학생이었고, 지금은 대자보를 쓰고 있는 지금의 20대 초반들은 87년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아이들이구나, 어떤 면에서 세대가 완전히 다른거구나, 하고 생각하기는 했다. 민주주의보다 공포가 먼저 체화된 세대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먼저 체화된 세대가 스무 살이 넘었으니, 세상은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집에 오는 동안, 영화 앞부분에서 그야말로 “소시민이 차곡차곡 꿈을 쌓듯 이뤄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뭐, 애초에 자기 손으로 “포기하지 말라”고 새겨놓았던 그 집에 가족과 함께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의지력만큼은 시작할 때에도 이미 수퍼히어로겠지만, 적어도 앞부분 시퀀스가 보여주려 한 것은 그런 모습이었지. 그거 옳은 길을 가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 어쩌면 위태롭게 만들게 될 것들. 그렇게 쌓아올린 세속적인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의지와 용기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생각하는 것이고 그 생각의 결과가 괴로움이라고 해도, 적어도 생각하는 것만이라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나는 무언가를 바꿀 가능성조차 다 잃어버리고 말 테니까. 시국이 이렇다 보니, 영화를 보면서도 결국에는 감상적인 부분이 남고 만다. 아직도 우리에게, 히어로가 필요할것 같은 시대인 것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