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생 때, 헌책방에서 손에 넣어 소중하게 보던 이 책이, 손바닥만한 양장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솔직히 기뻤다. 와인병과 주석 접시에 몇 개 얹은 고프레 과자. 죽은 아내와, 아내의 죽음 이후로 점점 죽음에 수렴하는, 그리하여 “모든 음계에는 끝이 있다”는 음악가 생트 콜롱브가 그 죽음의 세계 쪽에 서 있다면, 젊은 음악가 마랭 마레는 삶에 서 있다. 목소리를 잃고도 음악을 향해 손을 내밀고, 갖바치로 정해졌을지 모르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려 일어나고,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고, 배신하고. 마치 생트 콜롱브의 두 딸, 아름답고 섬세한 마들렌느(구판. 신판에서는 마들렌)와 격정적이고 통통한 가슴을 지닌 투아네트처럼. 생트 콜롱브의 “나룻배”를 생각하며, 안개와 어둠에 싸인 그 음악가의 집과 숲과 물가를 생각하며, 몇 번이나 입술로 중얼거렸던 그 대사들, 구절들을 생각했다.
“당신이나 폐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오. 난 내 손에 드리우는 황금빛 햇살이 더 좋소. 당신의 2절판 페뤼크보다 내 천 옷이 더 좋소. 왕의 바이올린보다 내 암탉들이 더 좋고, 당신보다 내 돼지들이 더 좋소.”
“자네의 망가진 목소리가 나를 감동시켰네. 자네 고통때문에 받아들였지, 자네 기교 때문이 아닐세.”
“그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목소리를 잃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소, 여보. 12년이 흘렀지만 우리 침대은 아직도 차갑지가 않소.”
“그는 갖바치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야.”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음악은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거라네.”
열 여섯 살 때나 서른 세 살 때나, 여전히 닿는 구절들. 하지만 그때 느꼈던 것과 지금 닿는 것은, 다르다. 희미하게 나직하게 어렴풋이 닿던 어떤 것들이, 이제는 조금 다르고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어른거린다. 어릴때 느꼈던 것이, “그에게 말하고 싶었어요. 나는 목소리를 잃었어요.”하던 연극 연습하던 여인의 대사처럼, 생과 사로 나뉜 부부,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등을 돌린 스승과 제자의 간극을 “말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음악이 메워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느껴지는 것은 조금 다른 것. 음악은, 어떻게 싹이 트고 어떻게 만들어지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생각이, 페이지마다 행간마다 닿았다.
“퐁카레 부인이 류트와 티오르바를 매우 뛰어나게 연주한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이런 재능을 신에게 오롯이 바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부인은 음악이 없어 견딜 수 없으면 생트 콜롱브에게 사룬마차를 보내 자기 집으로 오게 하고, 지쳐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티오르바로 그의 연주에 반주를 넣곤 했다.”
그저, 그대로 그 자리에 자연스레 있는 것. 신에게 바치는 것도 누구를 위한 것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어떤 것.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 비올라 다 감바를 끌어안듯이, 그렇게 포옹하며 바라보는 세계. 음악 뿐이랴. 수도 없이 많은 예술이라 이름 붙은 것들이, 그렇게 싹이 터서 자랄 것이다. 다시 오지 않을 수많은 것들, 잃어버리고 말 것들. 결국에는 죽음과 상실로 수렴할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리하여 인생이 없는 예술이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길지 않은 소설은 새벽녘 안개같은 빛깔 속에서 속삭이는 것이다.
ps) 지금 갖고 있는 신 판본은, 무려 책등과 책 표지에 제목도 인쇄되어 있지 않은 희한한 파본이다. 첫 페이지의 오타(회한의 무덤, 을 회환의 무덤이라고 쓴 것)에 대해 투덜거리며 그에 대해서도 트위터에 언급했더니 문학과지성사 담당자가 교환해주겠다고 하셨지만, 이런 파본은 나름대로 기념이라서. 그냥 내가 간직하고, 2쇄가 나오면 새로 구입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