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배신

희망의 배신 – 바바라 에런라이크, 전미영, 부키

바바라 에런라이크 배신 3부작이랄까, 희망의 배신, 노동의 배신, 긍정의 배신을 지난 1월에 구입했다가, 웨딩책을 쓰는 과정에서 잠깐 밀어두었다. 사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책을 사두기 때문에, 웨딩책을 끝낸 지금 하루이틀에 한권씩 읽어치워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아아아. (좋구나.) 웨딩책 계약금은 대부분 취재비로 썼는데 거의 계약금만큼 이런저런 책 지름에 쓴 것 같다. 기획서 공모전 상금 없었으면 웨딩책 쓰다가 적자 났을 듯. 어차피 나중에 고료가 들어오겠지만.

고등학교때 애를 낳은 것도 아니었고, 성적도 괜찮았고, 아부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승진은 꿈도 못 꾸고 시간당 7달러를 받으며 일하고 있어요. 학자금 대출 상환을 계속 미루면서 부모 집에 얹혀 살고, 평생 빚 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거라 절망하고 있어요. (9쪽)

이 책은 중산층의 몰락과정을, 실직과 재취업을 중심으로 바라본 책이다. 바바라 에런라이크는 스스로 구직중인 전문직 중산층으로 위장하여, 비정규직이나 아웃소싱으로만 인재를 뽑아려 하는 기업들을, 그리고 배울만큼 배웠고 실적을 거두었으면서도 실직하려는 이들을 “재취업을 위해 훈련”시킨다고 하며 인맥과 자기관리만을 강조하는 각종 코칭을 경험하고 관찰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는 쓸모가 있는지도 의심스러우며 사람을 회사의 충실한 노비로 만드는 것 같은 것을 컨설팅, 코칭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수많은 사기꾼같은 이들이 등장한다.

현역 임원들로 구성된 자신의 “지원그룹” 회원들을 소개받고 싶으면 최근 연봉의 4%를 선불로 내고, 취직한 뒤에 연봉이 얼마든 또 4%를 내야 한다고 했다. (196쪽)

그나마 인맥과 네트워킹은, 어쩌면 쓸모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든다. 어느 나라든, 인맥관리를 소중히 하라는 말은 기본으로 나오니까. 하지만 그냥 읽고만 있어도 저런데 사람이 낚이나 싶은 코칭이 이어지며, 실제로는 쓸 일도 거의 없을 온갖 스펙을, 갖추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식으로 젊은이들을 낚시질하는 온갖 교육업자들이 떠올라 기가 찼다. 아, 정말. 우리 물건을 사야 취직이 됩니다. 그런데 해도 다 되는건 아니에요. 안되는건 너님이 부정적인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죠. 이건 무슨 다이어트 약 파는 것하고 똑같지 않은가.

경험과 기술이 아닌 “인성”을 강조하는 것. (50쪽)

채용 결정의 90%가 감정적이라는 글을 읽으니 힘이 쭉 빠졌다. 능력이나 성과와는 무관하다는 건가? (53쪽)

이어지는 해답을 들으면서 충격에 휩싸였다. 구직은 일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었다. 구직 자체가 일종의 직업이고, 따라서 생활을 직장에서의 모습과 유사하게 만들어 나가야 했다. 시키는 대로 한다는 식의 그다지 바람직하다곤 할 수 없는 직장의 행태까지 고스란히 답습해야 했다. 어쩐지 시간증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64쪽)

프랑수아는 내가 “구직 개론”이라고 이름붙인 내용을 풀어놓았다. 엘리베이터 스피치, 잘 다듬어진 이력서의 필요성. 아니나다를까, 네트워크의 중요성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177쪽)

무슨 채플린 영화의 한 장면같은 모습이 제대로 된 직장인의 자세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을 것 같은 이 참담한 상황 와중에는 전세계적 베스트셀러ㅋㅋㅋㅋㅋㅋ인 시크릿과도 무관하지 않은 이야기도 나온다.

외면적 성과(EP)가 개인의 행복감(PSWB)과 연관돼 기하급수적으로 변하는 것이라면 PSWB에 대한 EP의 비율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그날 프로그램 내내 이 핵심명제는 EP10+/PSWB, EP10x/PSWB 등 다양한 사이비 수학적 형태로 줄곧 등장해 나를 미치게 했다. 더 큰 문제는 EP도 PSWB도 숫자로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이다. 행복감을 어떻게 계량화한다는 걸까? (91쪽)

패트릭의 말인즉 “그들”은 금기어였다. 경험에 근거해 자신의 이야기만 하라고 했다. (중략) 패트릭은 그녀의 분별있는 판단을 무시했다. 시장은 우리의 관심사가 전혀 아니며, “또 다른 그들”일 따름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가 실패의 변명으로 내세우는 외부의 힘 또는 실체가 “그들”이었다. (93쪽)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해) 기껏 훔쳐온 물리학을 안타깝게도 허나키는 망쳐버리고 말았다. “가속”은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이 가속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꼬투리를 잡으면 뭐하나. 속도가 빠르든 늦든 돈은 한 푼도 내 주머니로 날아오지 않는 것을. (109쪽)

신병 훈련소에서 만난 동료들은 정리해고와 관련된 주파수를 진동시킴으로써 해고를 자초해 일자리에서 밀려났단 것일까?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에게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네가 만든 것이라고 하는 건 더없이 잔인하지 않은가? (110쪽)

긍정적인 마음은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해 줘서, 어떤 일을 좀 더 집념을 갖고 이루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정말로 돈을 끌어당기고 직업을 끌어당길리가 없지. 내가 “나,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할 거예요!”하고 당장은 다소 손해보면서도 남에게 친절하고 씩씩하고 싹싹하게 행동하면 운이 좋다면 누군가 직업을 소개해 줄 수도 있는 거지만, 방구석에 앉아서 집념과 의지만으로 직업을 끌어당기는 게 가능할리가 없잖아. 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시크릿 주의자들은 그 말을 믿는다. 내가 감나무 밑에서 입만 쩍 벌리는 작자들ㅋㅋㅋㅋ 이라고 표현하는 부류이긴 한데, 지갑속에 10억원짜리 가짜 수표를 넣고 다닌다고 해서 10억원이 생기는게 아니죠. 짐 캐리가 거액의 수표를 써서 지갑에 넣고 다닌 것만으로 최고의 배우가 된게 아니라니까. 그 거액의 수표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노력을 했으니까 된 거지. ㅋㅋㅋㅋ 어휴. 물론, “잘되는 나” 쓴 목사처럼 미국의 기독교는 지극히 상업적이고 한심할 정도로 기업 친화적인 형태가 되어 있으며, 이게 취업코칭과 맞물려 이런 한심한 꼴도 보인다.

고난을 견뎌 나가는 것에 관한 목사의 설교가 담긴 CD를 사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중략) “CD를 듣고 기도했더니 2주 뒤 2군데에서 제안이 왔어요” 하지만 CD를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72쪽)

그냥 우리 차라리 무속신앙을 믿읍시다. (먼산) 하느님 참 바쁘시겠네.

왕을 보필하는 신하인 우리 홍보 담당자들은 왕을 경멸하며 압박을 가하는 동시에 왕의 관심을 갈망한다. 우리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 왕이 이미 아는 사항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전략적 틀 속에서 조언해야 한다. 우리는 왕의 신뢰를 받아야만 나라(회사)를 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공은 왕에게 돌아간다. (203쪽)

기업은 하나의 왕국이 되어 버렸고, 구직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바쳐 회사에 충실하지 않으면 버림을 받을 공포에 사로잡힌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상황일까.

기업의 입맛에 맞는 성격은 딱 하나. 항상 쾌활하고 열정적이며 복종적인 성격뿐이다.(283쪽)

예전에는 화이트칼라가 취미를 갖는 게 권장되었다. 독서나 브리지같은 평범한 취미라 해도 면접에서 꼭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요즘의 열정적인 직원들은 그런 사치를 부릴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모든 시간이 회사의 것이다. 휴가가 있다는 것을 잊는다. 밤 새워 일한다.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이를 때 까지 미친 듯 일한다. (287쪽)

매번 열정적으로 임하라는 요구는 매춘부도 받지 않는다. (288쪽)

열정은 강요된다. 복종은 필수항목이 되었다. 취미를 갖는 것은 사치스러운 소리가 되어버렸다. 이건 지금 내 주변에서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온라인상의 지인들 말고,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오랜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을 보면 틀림없이 보이는 모습이다. 직장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인 것 같다. 취미는 TV보는 것으로 수렴한다. 나중에 직급이 올라가면 등산이나 골프를 취미로 삼긴 하지만, 그 역시도 네트워킹과 무관하지 않다. 갑갑하고 답답한, 그런 모습을 “보통”이라고 부른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어떻게 살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아래 내용은 우리와도 그렇게 먼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겁이 났다. 특히 의료보험에 대한 부분들. 의료민영화에 대한 논의들이 떠올라서, 이게 우리의 몇년 뒤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나마 고용유연성이 떨어지는 우리는 이런 사회가 되었을 때, 순식간에 서민층이 몰살당하고 빈민층이 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의료보험 부담은 기업이 일자리 창출을 주저하는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하다. 기업은 보험 제공의 짐을 지지 않아도 되는 계약직을 고용하거나 아웃소싱 하는 쪽을 택할것이다. (291쪽)

훌륭한 성과를 거두어 월급 인상이라는 보상을 받은 사람은 비용 절감 조치로 제거될 위험에 노출된다. (301쪽)

틀을 벗어나 생각하면 찬바람 부는 바깥으로 내쫓깁니다. 회사가 듣고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말하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찍힙니다. 상사가 프로미식축구 결승전 파티를 열었을 때 이유가 뭐든 불참하면 퇴출자 명단에 오릅니다. 일주일에 50~60시간씩 일하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게 됩니다. 요즘 직장에서 살아남는 진짜 마법의 주문은 ‘남들이 하는 식으로 해라’입니다. (302쪽)

1995년을 기준으로 미국 노동자의 31%는 복지혜택이 없고 고용주와의 유대감이 미약한 비표준적 고용 상태에 놓여 있으며 그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229쪽)

기업들이 내게 기꺼이 주려는 것은 회사 로고가 박힌 셔츠를 입고 제품을 팔러 나가는 권리밖에 없는 듯 했다. (중략) 분홍색 캐딜락을 부상으로 받고 부동산 거래로 한 재산 모으는 등 드물지만 여기서 아주 즐겁게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온갖 노력을 쏟아도 빈곤선에 근접한 벌이밖에 얻지 못하거나 파멸한다. 바깥에는 안전지대가 없다. 늑대 무리가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뿐이다. (238쪽)

학력이나 능력과 무관한 저임금 전업일자리로 들어간 이들에 대해서는 신뢰할만한 통계자료가 전혀 없다.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다. 일단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떠밀려 실업상태에서 불완전 취업상태로 들어간다.(중략) 이런 사람들이 일단 웨이터나 판매원으로 안착하게 되면 정부의 눈에는 그들이 실업자로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관점에서 넓게 보자면 사건은 종료되고 문제가 해결된 셈이다. (257쪽)

이 책은 그러니까, “희망을 팝니다”라면서 이상한 것들을 팔아치우는 직업 코칭 업자들의 이야기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미국 중산층의 몰락, 사회와 기업의 승자독식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스펙업자들과, 빈약한 사회안전망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몸 바쳐 충성해봤자, 나이가 많아서, 실적을 올려서 그 보상으로 연봉이 올랐기 때문에, 버림받는, 토사구팽의 현장을 보고 있다보면, 그리고 이런 미국식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싶어하는 상부를 생각하면, 이미 몰락하고 있는 서민층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갑갑하다. 대체 우리는 언제가 되어야, 바닥에 땅을 딛고 살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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