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이 은촛대를 어쩌고 하는 이야기 말고, 마리우스가 나오고 자베르가 자살하는 한 권짜리 “레 미제라블”을 처음 읽은 게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중학교 때였나, 금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레 미제라블을 도서관에서 보았지만 마지막 권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권짜리, 아마도 혜원출판사 문학전집 중에 끼어 있던 레 미제라블, 세 권 짜리를 읽었다. 읽고 뿌듯하기까지 했는데 그와 비슷한 두께의 무려 다섯권 짜리가 또 있었다. 어머나. 읽었다. 그런데 이것도 완역본이 아니라고 했다. 대체 이놈의 것의 완역본이란.
완역본을 읽은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여섯 권 짜리, 그 다음에는 펭귄에서 나온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펭귄에서 나온 버전이 좋았다. 지금 집에 갖고있는 버전이기도 하고. 민음사판이 궁금하긴 하다. 내가 못 읽었던 금성출판사 판을 번역하셨던 분의 개역이라고 하니 더 궁금해졌다.
뮤지컬은 2003년에, 10주년 DVD를 보면서 접하게 되었다. 그 전에 토막토막 뮤지컬 곡을 주워 듣긴 했다. 10주년 DVD에 감동해서 그걸 보고 “빵도둑을 잡아라”같은 괴작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 (먼산) 25주년 DVD는, 마리우스가 나오는 부분들만 빼고 좋았다. 아, final battle의 연출이 좋았다. 그랑떼르는 이 25주년 뮤지컬로 승천했을 것 같다. 우와 세상에 못이룬 짝사랑을 뮤지컬에서 drink with me 부르는데 앙졸라와 미묘한 텐션을 보이다가 같이 어딜가는거야 당신들.
몇년을 기다렸다. 뮤지컬 모짜르트와 엘리자베트가 한국 들어와서 그냥 아이돌 뮤지컬이 되더라는 소식들을 들으며 이 뮤지컬이 제발 희한한 망작이 되지 않고 곱게 들어오길 바랐다. 맨 오브 라 만차를 보면서 정성화씨가 장발장을 해 주면 승천하겠구나 싶었다. 세상에, 정말 장발장에 캐스팅이 되었다. 오예. 뮤지컬을 봤다. 새해 되면 또 볼 거다.
……영화가 나왔다. 12월 19일. 투표를 하고서 보고 왔다. 아주 괜찮은 부분들과 아주 안좋은 연출들이 아주 희한하게 뒤섞여 있었다. 후시녹음이 아니라 현장에서 배우의 목소리와 감정을 살린 것은 좋았다. 앤 해서웨이나 휴 잭맨의 노래는 좋았다. 표정과 맞물려 상당히 시너지가 있긴 했는데.
이 무슨 대갈치기의 향연인가. 대갈치기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뜻을 명확히 깨달으리라. 이렇게까지, 이마에서 어깨까지만 미친듯이 보여주는 연출이라니. 내가 만약에 32페이지짜리 콘티를 짜면서 한 25페이 정도를 이런 대갈치기로 발랐다면 나의 친애하는 담당님은 그냥 날 두토막을 내셨으리라. 단언한다. (……) 두시간 내내, 맨 처음 발장과 주교님 만나는 장면과 혁명장면과 발장의 죽음 빼고는 익스트림 클로즈업만 보다 나온 기분이다. 연출을 하다 졸았나. 필름을 아끼느라 용을 썼나. 온갖 만감이 교차했다. 뭐, 그 선에서 그치기만 했다면 아마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겠지. 러셀 크로의 자베르는 원곡에 비해 톤을 다소 낮춘데다 비주얼은 괜찮은데(그야말로 자베르 순경부터 총경포스 자베르까지, 승진하면서 휘장이 늘어나는게 막 보인다) 목소리가 훌륭하진 않았다. 장발장의 적수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장발장을 놓친 자베르가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나와 도시를 바라보며, 난간을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며 부르는 star. 세느 강변에서 다리 난간을 밟으며 부르는 Suicide. 두 장면이 이루는 대구가 좋았다. 발장이 코제트를 데리고 수녀원 담을 넘거나, 가브로쉬가 발장에게 쪽지를 전해주거나, 가브로쉬의 아지트인 코끼리라든가, 앙졸라의 최후 같은, 뮤지컬에서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부분들이 영화에 짧게나마 분명히 표현되는 것이 너무너무 좋았다. 마지막에, 죽어가는 발장 앞에 그의 마지막을 인도하러 나타난 이들이, 뮤지컬 버전에서는 팡틴과 에포닌이었다. 팡틴이라면 모를까 에포닌이라면 좀 뜬금없다고 생각해서, 예전에 그 미리엘 주교님이 함께 나타나는 픽을 짧게 썼던 적이 있는데. 어머나. 영화에서는 에포닌 대신 주교님이 그의 영혼을 인도하러 오신다. 처음, 발장이 죄를 씻고 인간의 양심을 되찾으려 했던 바로 그 성당을 연상하게 하는, 촛불이 가득 켜진 제단 앞에서. (그것도 그 주교님 역을 맡으신 배우는 10주년 콘서트의 장 발장, 콤 윌킨슨 씨다.)
현실에서 젊은이들이 이루지 못했던 바리케이드, 장발장이 평생을 쌓아간 지고의 덕, 그런 사람의 마음 속에 담긴 간절한 마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담긴, 그 “꿈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그때 죽어간 ABC의 청년들과, 발장과 팡틴과 죽어간 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피날레는 확실히 멋졌다. 그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몇번 더 볼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그러나.
선거가 끝나고, 개표가 끝나고, 대체 한국에서 레 미제라블을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한 가운데(그리고 이 영화의 바리케이드 장면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싶은 와중에) 이 영화는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선거에서 패배한 지지자들의 멘붕을 치유하는 “힐링”영화로 둔갑해서. 대체 그 영화의 어느 부분에서 힐링을 논하고 싶은건지, 보고 나온 사람이건 영화 홍보팀이건 아무나 멱살을 잡고 묻고 싶지만, 원작을 몇 번이나 차근차근 읽을 때, 10주년 DVD를 수십 번은 되덜려 볼 때 느꼈던, 볼 때마다 달라지던 그 모든 섬세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그냥 “힐링”으로 뭉뚱그리는 그 무신경함에는 질릴 정도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음 속에 아껴두었던 작품 하나가 대갈치기물(….)이 되어 돌아오는 것은 좀 그렇네, 하고 농담을 했지만, 아껴두던 작품이 대갈치기가 된 것 정도는 그냥 재미있는 농담거리일 뿐이지. 마음속에 아껴두었던 작품 하나가 “싸구려 힐링용”으로 전락하는 건 정말 참혹하구나. 이젠 힐링이라는 단어도 지겹다.
그냥 힐링같은 헛소리들 지나고 나면 팬픽이나 몇편 더 쓰고 싶다. 지금은 쓰기도 싫다. 힐링 좋아하네. 어디 삶아먹지도 못할 힐링같으니. 요즘들어 제일 싸구려가 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 그놈의 힐링일거다.
댓글
“영화 레 미제라블”에 대한 5개의 응답
25일에 부모님과 함께 보았습니다. 뭐랄까.. 저는 자베르의 캐릭터 해석은 좋았다고 생각하고, 레셀 크로우에게도 민족하지만.. 제 마음 속의 자베르의 외형적 이미지는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의 경감이어서 그건 좀 달랐어요
(사실, 장발장이 힘이 믿지 못할 정도로 세잖아요? 근데 그걸 휴 잭맨이 표현하니까 조금은 아쉬웠달까..^^ 그가 특별히 왜소하거나 약한 느낌의 배우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리우스 역의 배우가 모든 면에서 별로고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아니, 수녀원에서 교육받아 그러나.. 애가 남자보는 눈이..-_-;;)
그러게.. 혼동되면 스마트폰 검색이라도 해보면 그 중 맞는 정보 찾기가 어려운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전 동서문화사판 두 권으로 된 양장본 갖고있는데 말입니다. 이 판, 읽으셨는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옛날 번역 티가 나긴 합니다. 뭐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보고.. 그리고 책(제 동서문화사 판 말입니다)에서는 장발장이 죽을 때 팡틴과 주교님이 마중나오던데..?? 동서문화사 판도 잘못된 자름의 사례인걸까요??…
장 발장이 죽기 전에 코제트에게 “언제나 팡틴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진찰하러 온 의사가 “(종부성사를 해 줄)사제를 부르는 게 좋을것 같다.”고 하자 장 발장이 “내겐 이미 사제가 있다.”고 하늘을 가리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그 부분을 그렇게 요약한게 아닐까요 ^_^
그리고 마리우스는 원래 찌질한 애니까요! 영화버전에서 마리우스 역 맡은 배우는 정말 미성이고, 나름 소년다운 미숙한 느낌이 잘 살아서 좋았어요. 목소리만 놓고 보아도 25주년의 마리우스보다 이쪽이 더 잘 불러요.(10주년의 마이클 볼 씨에 비교하면 안되는 거지만) 25주년의 마리우스는 코제트에게도 성량이 딸리는 사람이라 정말 마리우스의 찌질함 자체는 살렸을지 몰라도 보는 사람도 절망적이랄까 어….. 그런데다 연기도 좋았고.
마리우스는 원작에서부터 소위 찌질한 개릭터이긴 했지요^^;(사실 원작 기반으로 마리우스 부친부터가 제 맘에는 안 드는 캐릭터였고)
그러니까 그 종부성사 할 신부님 얘기할 때 장발장이 환상으로 미리엘 주교를 보고 있었다..라고 쓰여있던 것으로 기억하거든요?(한번 확인해 봐야겠네요^^;
그러게요. 저도 다시 봐야겠어요. 환상을 보고 있었다면 발장이 “내겐 이미 사제가 있다”고 한 장면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