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창

현시창 – 임지선 글, 이부록 그림, 알마

얼버무리며 “그래 원래 아프니까 청춘임 ㅇㅇ”하는 허접한 책들이 힐링이라는 허황한 화두를 코끝에 걸어 붙이고 서점에 그득그득 쌓여 있는 것을 보다가, 이 책을 보고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구입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 내가 들은 이야기,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 당의정을 바르지 않은, 쓰디쓰고 아픈 그대로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저자는, “4천원 인생”에 나왔던 비정규직 체험 기사를 썼던 바로 그 기자라고 알고 있다. 고깃집 서빙을 하는 식당 노동자로 위장취업했던, 그 인권 OTL 기사 말이다. 그 기자가, 이번에는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는 부제를 달고 이 책을 내놓았다. 희망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실낱같은 기회마저 빼앗기고 말아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몸부림치지만 이마트 지하에서, 혹은 용광로에서 목숨을 잃거나, 더러는 무기력해지고 자신을 포기하는, 그런 청춘 잔혹사. 이대로 계속된다면 세대갈등, 계층갈등으로 이어지고 말, 이 절망의 기록을.

돈 때문에 울고, 21세기에도 아직도 구시대형 가부장의 잔해같은 직장내 성희롱과 예비시댁의 폭력에 좌절했지만, 적어도 성년이 될 때 까지는 보호를 받았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적어도 성년이 될 때 까지는 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겪었던 일들을, 이 시대가 청년에게 강요하는 것들을, 보호받지 못하는 인권을, 억압을, 강요하는 경쟁을 생각하며 분노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내 아버지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 현실에 감사하고 살라고 하셨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 함께 분노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사람의 길이 아닌가.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서 현실에 감사하고,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보면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은, 결국 이 모순을 공고히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덧붙여 허접한 힐링책들 좀 그만 팔리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길 기원한다. 눈 앞의 당의정을 씌우지 말고 직시하자. 이건 아주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모습들을 보지 않았던가. 겪지 않았던가. 절망을.

ps) “만삭의 의사부인 살인사건”과 “부모에게 살해된 세 살배기”를 읽을때는, 그들의 현실과 상관없이 일단 분노부터 끓긴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부모에게 살해된 세 살난 아이 이야기는. 죽은 아이의 형과 동생을, 그 아이를 죽이고 유기하는 데 가담했던 그 엄마가 여전히 맡아 기르고 있는 것도. 대체 이 나라는, 아동 인권에 대해서는 뭘 어쩌자는 건가 싶고. 하긴, 오늘 트위터에 보니 몽고 쪽 아이가 불법체류자라고 학습권도 무시당한 채 추방처분 받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갈 길이 멀긴 멀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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