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시작된다

만화가 시작된다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 히로미, 학산문화사

2011.02.20.

연재를 앞두고 긴장된 마음을 안은 채, 만화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지기 위해 구입한 책이었으나 열어보니 이노우에 다케히코 – 그러니까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슬램덩크의 작가 말이다. – 의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이토 히로미(시인이라는데 난 그녀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의 이노우에 팬심, 아니, 슬램덩크 팬심에 대한 책이라서 대체 뭘 하자는 책인지 모르겠다. 이런걸 양장본으로 내지 말라고, 학산. 나무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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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8

처음 저 책을 읽고 진저리를 냈다가 12년만에 다시 읽은 것은 역시 더 퍼스트 슬램덩크 때문이었다. 1990년대에 연재를 실시간으로 달리던 그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열광하다가, 슬램덩크와 관련된 책들을 다시 꺼내 읽다가, 마침내 책무더기 속에서 저놈의 책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사실은 발견해 놓고도 이걸 다시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좀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휴가중에 마음먹고 찬찬히 다시 읽어 보았다. 여전히 만고에 쓸모없는 책이지만, 12년 전에 왜 그렇게 진저리를 냈는지 이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만은 기쁘다.

덕후가 맑은 눈의 광인처럼 눈을 번들번들 빛내며, 원작자 앞에서 자신의 썰을 풀고 있는 참혹한 모습을 상상해 보자. 원작자는 수줍지만 나름 점잖은 사람으로, 작품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가 있지만 어느정도 덕후의 이런저런 주장들을 – 또 다른 덕후가 듣고 있자니 “아니 잠깐 그건 아니잖아”싶어지는 주장까지 포함해서 – 어느정도 부정하지 않으며 들어준다. 그랬더니 덕후는 더욱 신이 나서 수치심도 모르고 망상을 떠들어대고, 원작자에게 자신의 망상이 맞는지 확인하려 들고, 원작자가 얼버무리면 “역시 이건 이런 해석이 맞는 거예요.”하고 단정짓기까지 한다. 뭐, 떠드는 덕후는 즐거울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난 뒤 수치심으로 얼굴이 벌개진 채 지붕이 뚫리도록 하이킥을 할 수도 있으며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암살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여튼 읽고 있는 또다른 덕후는 자기가 한 말도 아닌데 공감성 수치를 느끼며 벽에 머리를 박고 싶어진다. (12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원작자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뭐라고 해야 하나. 창작을 했고, 그 작품에 대해 다른 사람이 그릇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예, 예, 하고 들어주고 있는데 더욱 신이 나서 “그건 아닌데요.”라고 말하는데도 “그게 맞잖아요!!!”하고 우기고 있는 꼴을 보고 있는 상황이라니. 도망가고 싶었을 텐데.

다시 보니 장점도 있다. 처음 이 책을 읽고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토 히로미는 시인이고, 시로서 나름 일가를 이룬 사람이고, 신화와 에로티시즘, 페미니즘과 모성에 대한 사유를 통해 글을 쓴 사람이다. 그가 그 관점에서 슬램덩크를 군기물로 해석하거나, 산왕고등학교 카와타(신현철) 형제의 어머니의 관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형제에 대해 말하거나 하는 것들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만화 연출에 있어서도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그가 만화의 연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으스대며 말하는 부분들이 무척 짜증이 났는데, 이 점은 그동안 내가 만화를 연재하고, 만화 연출에 대해 나름대로의 공부가 쌓이면서 더욱 짜증스럽게 다가왔다.

어쨌든 이토 히로미 선생의 슬램덩크 동인지(정대만 메인)가 있다면 보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만, 이 책을 과연 다시 읽을까. 그럴 것 같진 않다. 12년 전에 학산은 대체 왜 이 책을 하드커버로 냈는가, 하고 투덜거렸는데, 지금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지만 왜 학산에서 나왔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 당시에는 대원씨아이에 일반서 브랜드가 마땅히 있질 않았다. 학산은 이것저것 일반서들도 나오고 있었고. 그 문제였을 것이다. (학산이 대원의 자회사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니 생략.) 어쨌든 제목인 “만화가 시작된다”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나갔다. “슬램덩크, 에로스와 타나토스”같은 제목을 붙이는 편이 내용에는 더 부합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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