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고전읽기-041]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민음사 세계문학 88

솔직히 나는 뻔한 트렌디 드라마와 로맨스 소설을 싫어한다. 평범한 집안의 당돌한 구석이 있는 똘똘한 아가씨가(요즘은 종종 머리가 나쁘게 나오기도 한다. 백치미가 자랑인가? 그런 캐릭터에 이입이 된다고?) 우연히 잘나가는 스펙에 성격 까칠한 “실땅님”과 만나고 좌충우돌 끝에 사랑에 빠지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하더라 하는 이야기는, 대한민국 어느 시대에 TV를 틀어봐도 어디선가는 방영하고 있을 뻔하디 뻔한 이야기다. 개나 물어가라지.

여성향 라이트노벨 쪽에서 신부가 나오면 요메물, 공주님이 나오면 히메물, 그런 식으로 부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한국 드라마의 그 모든 저 뻔한 이야기들은 남자가 실장님이냐 종사관 나으리냐 깨방정을 떠는 왕님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어쨌건 결국은 같은 구도다. 흔히들 평범녀와 잘나가는 남자의 결합을 신데렐라 스토리라 부르면서 비웃긴 하지만 신데렐라도 따지고 보면 귀족의 딸이고, 계모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영애였을 것이며, 무엇보다 몸매며 얼굴이며 다 받쳐주었을 거다. 이런 평범녀로 분류하기에는 사실 좀 미안하다. 오히려 성깔있는 평범녀와 까칠한 왕자님의 만남, 소위 “실장님물”의 원조는 바로 이 오만과 편견이다.

재산 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첫 줄부터, 새로 이사 온 재산 깨나 있는 독신 남자를 노리는 다섯 딸을 둔 엄마의 대화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이 통속성은 과하도록 확연히 드러난다. 차라리 BBC 드라마로 볼 때에는 콜린 퍼스의 매력이나, 당시의 복식이나 춤, 더 나아가서는 아마도 샤워기 아래에서 탕 하고 벽을 치며 고뇌하는 씬의 원조;; 처럼 연출된, 욕조 안에서 막 고뇌하는데 풋맨이 와서 헹굼물을 부어주는 장면;;; 같은 것을 보며 즐거워 할 수라도 있었지만, 이게 책으로 나와 앉아 있으니 이번에는 내가 문제다. 고전이고 뭐고 갈 것 없이, 뻔하고 통속적인 로맨스는 아마존 밀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게 있어 이 소설은 이 바닥의 원조 오브 더 원조일지는 몰라도, 이미 내가 과하도록 싫어하는 그 모든 구조와 클리셰를 지니고 있어 읽는 내내 짜증에 시달려야 했으니. 그나마 좋은 번역 덕분에 보통의 한국 로설들을 대할 때 처럼 읽다 말고 벽에 집어던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끝까지 인내를 갖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고전이요,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했을 소설이라는 점도 인정한다.

BBC 드라마 버전에서 다아시 역을 맡았던 콜린 퍼스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만과 편견의 현대판인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에서도 콜린 퍼스는 다아시에 해당하는 잘나가는 까칠남 역을 맡았다. (아마 무슨 변호사였을 거다) 하지만 그나마 시대물이라는 매력을 지닌 BBC 드라마 버전과 달리, 현대물 쪽은 너무 뻔해서 보다가 졸았다. 콜린 퍼스 아니라 누가 나와도 지루했을 거다. 그런 것을 보면 내 취향이, 확실히 보편타당하고는 거리가 먼 것도 사실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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