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고전읽기-036]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민음사 세계문학 19

파리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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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소년 표류기의 리얼 버전이랄까. 브리앙을 중심으로 소년들이 마치 훈련나온 보이스카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더러는 싸움을 하기도 하지만 서로 챙겨주며 함께 살아남는 그런 훈훈한 이야기는 없다. “소라”로 상징되는 권위, 문명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정신을 상징하는 랠프와, 검은 옷, 권력욕, 그리고 사냥으로 대변되는 야만적힌 힘을 상징하는 잭의 대립을 중심으로, 이름 없이 그저 “돼지”라고 불리는 안경 낀 소년(지식인)과 두려워하는 짐승이 사실은 시체라는 것을, 그리고 진짜 짐승은 우리 안에 있는 야만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소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이먼(예언자)이 두 희생자로 존재하며, 다른 아이들은 잭과 랠프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야만을, 랠프를 선택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어렸을 때는 좀 더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그 직전에 읽었던 십오소년 표류기의 여파 때문이었을까.

“너를 도와줄 사람은 이곳엔 아무도 없어. 오직 내가 있을 뿐이야. 그런데 나는 <짐승>이야.”
사이먼의 입이 한참 애를 쓰더니 똑똑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막대 위에 꽂힌 암퇘지머리야.”
“나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 하고 그 돼지머리는 말하였다. 그러자 순간 숲과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장소들이 웃음소리를 흉내내듯 하면서 메아리쳤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웃음소리가 다시 떨리며 메아리쳤다.
“자”하고 파리대왕은 말하였다. “딴 아이들에게로 돌아가. 그러면 우린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돼.”

문명화된, 영국 소년. 그들이 섬에서 보이는 행동은 결코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규율을 밥먹듯 어기고, 꼭 필요한 일부터 순서대로 하는 대신 감정대로 움직인다. 그 첫 사건이, 이곳에 도착한 첫 날 봉화를 올리겠다고 산에 올라가 불을 피우다가 숲의 절반을 구워버리고, 얼굴에 반점이 있던 어린아이가 불길에 희생되는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심인물들을 제외하면 어린아이들은 이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몇 명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도 초반에는, 소라를 쥔 랠프와 그 브레인 역할을 하는 돼지가 조심조심 상황을 이끌어 나가고, 성실하게 일을 해 내는 사이먼이 그들을 돕는다. 하지만 멀리 배가 지나갈 때 봉화가 꺼지고, 그때 봉화를 지켰어야 하는 쌍둥이들이 잭과 함께 멧돼지를 사냥해 오며, “고기”에 대한 욕망은 문명이라는 인내를 넘어선다. 결국 패가 갈리고, 잭은 야만인들처럼 얼굴에 얼룩덜룩 진흙을 칠하고, 모두가 두려워하는 “짐승”에게 제물을 바친다며 죽인 멧돼지의 머리를 잘라 걸어놓는다. 그들은 고기를 놓고 노래하고 춤추다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사이먼을 때려 죽이기에 이르고, 불을 얻기 위해 돼지의 안경을 훔친다. 그리고 결국 바위를 굴려 돼지를 죽게 만든다. 하나의 우화로서, 이들이 벌이는 모든 일들이 작은 사회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문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껍질을 쓰고 있는지, 현실에 던져졌을 때 인간은 얼마나 간단히 문명이나 양심을 저버리고 힘의 논리를 따를 수 있는지, 문명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또 이 아이들과 달라봐야 얼마나 다를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걸 읽고 나니 십오 소년 표류기를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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