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인천 교사연극회에서 연극을 하셨다는데, 그때 맡으셨던 역할이 리어 왕에 나오는 글로스터 백작이었다. 리건의 남편 콘월공에게 잡혀 눈알을 뽑히는 장면에서 피 대신 케첩을 쓰시다가 케첩이 눈에 들어가서 진짜 비명을 질렀다고 웃으며 말씀하셨던게 생각난다.
리어 왕은, 4대 비극 중 가장 인간과 인간의 애증이 강렬하고, 가장 드라마틱하다. 편하게 노년을 보내려고 했다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아버지가 나오고, 더 많은 파이를 노리는 자식들이 나오며, 형과 아버지의 권위를 노리는 서자가 나온다. 나쁘게 보면 아침드라마의 미덕을 고루 갖추었고 좋게 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원형이 되어버린 작품. 그렇기에 햄릿의 주인공은 햄릿이고, 오셀로의 주인공은 오셀로와 이아고이며, 맥베스는 맥베스 부부가 주인공이 아닐까 하고 바로 주인공을 떠올릴 수 있는 반면에, 리어 왕의 경우는 수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코딜리어를, 고너릴과 리건을, 그 남편들을, 눈이 먼 글로스터 백작과, 눈 먼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정체에 침묵하는 에드거와, 리어 왕에게 추방당하고도 하인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어떤 노예도 바치지 못할 충성과 봉사로 그를 섬기는 켄트 백작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독자인 나는 “형의 자리”를 노리는 동생이자 서자인, 클로디어스이자 맥베스이며 동시에 “질투하는 사람”인 이아고이기도 한 에드먼드 글로스터를 본다. 의심과 어리석음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리어 왕이 오셀로의 변주라면, 그를 기만한 것은 두 딸인 고너릴과 리건이되, 이아고의 위치에는 에드먼드가 서 있는 것이 아닐까.
리어 왕의 입장에서 볼때 결국 왕국을 물려주려 한 딸들은 모두 죽어버리고, 왕국을 물려줄 법 했던 딸도 살해당하고, 결국은 죽 쑤어 남 좋은 일만 한 셈이다. 리어 왕과 세 딸들의 이야기가 큰 주제를 이어가는 가운데, 그에 대한 변주인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속고 배신당한 아버지,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했으나 외면당한 자식과, 아버지를 기만하고 모든 것을 손에 넣으려 한 자식의 대립. 그리고 버려진 아버지가 외면한 자식에게 구원당하는 이 이야기는 결국 바리공주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어지는 어떤 원형을 집대성한 것과 같다. 정의가 승리한다, 는 간단한 구도, 악이 패배한다, 는 발전된 구도를 넘어, 정의와 도덕을 따랐지만 결국 패배한 코딜리어라는 주인공은, 그때까지의 인물과는 다른 비극을 안고 새로운 시초가 되었다. 4대비극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맥베스라면, 가장 이야기로서 완성된 것은 역시 리어 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