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젊어서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지 않는 사람은 바보요,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 주의자인 사람은 더한 바보라는 말이 있다.
젊 어서 데미안을 읽지 않은 사람은 바보요, 나이 들어서도 읽은 척만 하는 사람은 더한 바보일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 책좀 읽었다고 깐죽대는 청춘들이 고등학생, 중학생, 요즘은 초등학생도 읽고서 음 나 그 소설 읽었어 하고 아는 척 하는 책. 하지만 흔히 말하는 그 아프락사스의 우화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는 그 말 말고, 데미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또한 어째서인지 요즘은 동인녀들의 떡밥으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이건 사실 마지막의 그 “눈을 감아 싱클레어” 한 마디로 오만가지 BL 설정이 가능해지더라는 뭐 그런 감성 때문이기도 한데 사실 헤세 영감님의 소설들 어느 것 하나라도, 그쪽 방향의 시선으로 보면 그바닥 이야기가 아닌 게 없다. 뭐 그렇지만.
데미안 은 “표적”을 가진 사람, 남들과 다른 사람이다. 그것은 종교와 도덕, 규칙에 얽매인, 그야말로 교회적이고 모범적인 인간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탈선이나 범죄와는 다르며, 오히려 어른스러움에 가깝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힘,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힘.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살아내는 그 힘은, 남들의 눈치를 보고 조용히 묻어가는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그의 “표적”, 카인의 표적이다.
그런데 “왜 너희들도 그 사람을 그냥 쳐죽이지 않는거지” 라고 누가 물으면 그들은 “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이 그에게 그려 주신 겁니다!”라고 말했지. 대략 그런 식으로 그 사기는 이루어졌을 게 틀림없어.
비참한 이 상황이 시작되었던 저 고약한 저녁, 그때 나는 한 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밝은 세계 그리고 지혜를 문득 꿰뚫어본 듯 경멸했다! 그렇다, 그때 나는 카인이었고, 그의 표적을 달았던 나는 이 표적은 치욕이 아니라고, 이건 표창이라고 함부로 상상했다. 악의와 불행을 겪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높은 곳에,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 있다고.
돌 하나가 우물 안에 던져졌고, 그 우물은 나의 젊은 영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긴, 몹시 긴 시간 동안 카인, 쳐죽임, 표적은 바로 인식, 회의, 비판에 이르려는 나의 시도들의 출발점이었다.
데미안이 그의 인생에 개입하며, 싱클레어는 조금씩 자신의 인생을 비판하는 것을,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지닌 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배워간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크릿을 사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미 그 시크릿이라 불리는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때 데미안을 읽은 뒤였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으며,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소망이 내 자신의 마음 속에 온전히 들어 있을 때, 정말로 내 본질이 완전히 그것으로 채워져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에서 배웠고 실천했다. 실제로 많은 일들이 그랬다. 소망이 가득 찬 순간,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사소한 기회들이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이런 시크릿의 유인력, 혹은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얼마나 불편한 이야기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크릿이나 연금술사보다 한참 전에, 헤세는 데미안의 입을 빌려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신이 관할하는 것은 이 세계의 밝은 면 절반 뿐, 나머지 반은 악마에게 떠넘겨 놓았을 뿐이라고. 인위적인 절반이 아니라 전체를 모두 예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과 함께.
이성이 아닌 자신의 감정과 감각들, 우리가 불쾌하게 여기고 도덕이나 신앙으로 억지로 덮어두는 욕구들을, 싱클레어는 하숙 생활 속에서 깨달아 나간다. 술을 마시고 음담패설을 지껄인다. 싱클레어는 그런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약동하는 감정들을 깨닫는다. 감정이 있었다! 불꽃이 솟았다. 그 속에서 심장이 경련하였다! 나는 비참의 한가운데서 해방이자 봄 같은 그 무엇을 혼란스럽게 느꼈던 것이다.
처 음으로 싱클레어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소녀, 베아트리체. 그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베아트리체를 그림으로 그리려 애쓴다. 그러나 그가 그린 것은 베아트리체인 동시에 데미안이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 안에 있는,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 악마와 신이 결합된 무엇. 압락사스는 그리스적이고 이교적인 신이자, 동시에 헤세가 심취했던 동양적 사상, 불교적인 면과도 떼어놓을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압락사스에 대해 설명해 줄 또 한 사람,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된다.
이 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압락사스야. 그런데 그는 신이면서 또 사탄이지. 그 안에 환한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가지고 있어. 압락사스는 자네 생각 그 어느 것에도, 자네 꿈 그 어느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결코 잊지 말게. 하지만 자네가 언젠가 나무랄 데 없이 정상적인 인간이 되어버렸을 때, 그때는 압락사스가 자네를 떠나. 그때는, 자신의 사상을 담아 끓일 새로운 냄비를 찾아 그가 자네를 떠나는 거라네.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 어떤 어마어마한 불결한 짓을 저지르고 싶다면, 한순간 생각하게. 그렇게 자네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압락사스라는 것을!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데미안을 만나고 싶은 소망, 어머니이자 여자이고 남자이며 데미안이기도 한 꿈 속의 연인. 그 갈망 속에서 마침내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만나고 자신의 꿈 속의 연인이 바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대위로서 참전한 데미안은 부상당한 싱클레어에게 에바 부인의 키스와 함께, 이제는 자신이 언제나처럼 달려올 수 없음을, 자신이 필요할 때는 마음 속을 들여다 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전사한다) 자신의 사상을 담아 끓일 새로운 냄비를 찾아 떠나는 데미안, 그리고 자신 안의, 신이자 악마이기도 한 존재와 하나가 된 싱클레어. 이보다 더 한, 자아를 들여다보고 신적 자아와 하나가 되며 자신의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어보는 신화가 또 있을까. 청춘의, 자아를 찾아가는 길인 동시에 이 소설은 하나의 불교적 우화이기도 하다. 초등학생 때 낼름 읽어버리고는 그러저러한 내용이었어요 하고 간단히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ps)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이 판본에서는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로 바뀌었다. 아프락사스로 흔히 번역되는 그 신은 압락사스로 번역되었다. 몇가지, 갖고있던 판본과 다른 점이 눈에 띄지만, 투쟁한다, 쪽이 더 강렬한 의미를 전해주는 것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