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퀸

더 퀸 (2023.7.9. 추가)

일단 영화를 보려고 벼르고는 있었다. 있었는데 군산 내려가는 버스와 CGV 시간이 맞지 않아서 부득이 연수동에 자리한 IMC 9 에서 보기로 했는데.

멀티플렉스라며!!!!!

와아, 무슨 멀티플렉스가 1980년대 애관극장 급이다. 7층에서 보라고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라고 해서 갔더니 난 무슨 삼거리 극장인줄 알았다. 다음번에는 여기 이용하지 말아야지. 게다가 얼마나 사람이 없는지, 영화 보러 들어갔더니 세이랑 나랑 단 둘 뿐이다. 일요일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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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대략, 다이애나가 프랑스에서 교통사고로 죽고, 그녀의 장례식이 치러질 때 까지 1주일 동안의 이야기다. 토니 블레어는 새로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왕실에 회의적인 노동당의 당수고, 게다가 그 부인은 왕정 폐지에 대한 생각까지 갖고있는 진보적인 변호사 출신인데, 여왕님은 그야말로 아들 뻘인 이 총리가 새로 인사를 드리러 오자 “당신까지 10명의 총리가 있었다-너같은 놈은 수도없이 봤다는 뜻으로 들림” 부터 “윈스턴 처칠이 내 첫 총리였는데 그사람은 여왕이 어리니까 가르치려 들었다-처칠이 가르치려 드는 꼴도 두고 못 봤는데 너같은 놈이 까불면 죽어로 들림” 까지 15분동안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접견을 하고 돌려보낸다.

그런데.  

블레어가 총리가 되자마자 갑자기;; 그동안 이혼 전에도, 그리고 이혼 후에도 왕실에는 스캔들로 오명을,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자선사업과 예술에 대한 이해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다이애나가 그만 애인인 도디 알 파예드와 함께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해 터널로 들어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거다. 그것도 여왕님은 모처럼 휴가를 간 사이에. 여왕님은 이제 다이애나는 왕족도 아닌데 자신이 따로 입장 표명을 할 이유도, 국장을 치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냉정한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다이애나에 대한 애정이 깊은 국민들은 그에 반발한다. 블레어는 총리의 의무로 국민들의 뜻을 여왕에게 전달하는 한편으로, “민중의 왕세자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고, 또한 다이애나와 그다지 사이도 좋지 않았던 주제에 이번 일을 기회로 어머니에 반발하며 자신의 지지기반을 세우려는 찰스의 행각도 일부 도와주려 하는 등 그 1주일동안 열심히 줄타기를 한다.

그러나 마침내 여왕이 뜻을 꺾고, 다이애나에 대한 추도를 하고, 그녀의 장례를 웨스트민스터에서 변형된 형식의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심한 순간, 블레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였는지 깨닫는다. 그것은 선택할 권리도 없이 아버지를 잃고 너무 젊은 나이에 여왕이 되어야 했던 여왕의 자존심을 쥐고 흔들었던 것. 그리고 블레어는 1주일만에 여왕의 빠돌이가 된다. (탕)

……..이건 농담이고. 여왕 남편은 필립 공은 말하는 것이나 뭐나 마음에 안 들었고, 찰스는 어디서 저렇게 인상 더러운 것 비슷하게 생긴 배우를 데려다 넣었나 싶었지만 그거야 분장 나름도 있고 하니까. 그래도 그동안 언론이나 다이애나 관련 책에서 나온 모습보다는 좀 나아 보이긴 했다. 일단 여왕 부부보다는 상황파악이 되는 느낌이로. 하지만 그렇다고 찰스 역할이 괜찮게 느껴진 것은 아니다. 애인도 있고 나이도 10살 넘게 차이나면서 21살난 젊은 아가씨랑 결혼해서 남의 인생 조져놓은 놈이기도 하지 않은가.

여왕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다가, 산에서 지프차가 고장나 사람을 기다리다가 혼자 눈물을 흘리던 여왕이 뿔 열네 개 난 커다란 사슴과 조우하는 장면은 좋았다. 그 사슴이 결국 사냥당하여 매달려 있는 모습은 왕실의 종말을 느끼는 여왕의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여왕 역을 맡은 헬렌 미렌은 전에 본 조지 왕의 광기에서도 여왕 역이었고, 검색해보니 엘리자베스 1세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 역을 맡았다더니. “여왕의 위엄”과 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 느낌이다. 그나저나 이분 히치하이커에도 나오셨어? 에에에? 아, 목소리 출연이셨구나. 하여간.
 
내 주변 여왕님 페치, 마님 페치들이 보면 좋아할만한 영화인 동시에, 왕실을 비웃던 총리가 단 1주일만에 빠돌화되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로서…… (탕탕탕탕탕)

농담이고.

의회 민주주의의 선진국이지만, 동시에 왕정이 남아있고, 국민들은 변화를 원하는 시기. 한 나라의 수장이자 세습 지도자로서의 여왕이란 어떤 위치인가에 대한 영화인데, 보면서 이런 장면은 화면이 좋았다거나 하고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영국 왕실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이애나의 결혼식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국 왕실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지만, 그의 죽음은 모두에게 왕실에 대한 환상이라는 것을 걷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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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9. 추가.

대략 16년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예전에 볼 때에는 “다이애나의 죽음과 그 일주일간의 사건들”이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과연 시간이 흐르면 감상 포인트도 바뀌는 법이고 “토니 블레어는 어쩌다가 마성의 여왕에게 감겨서 일주일만에 여왕폐하의 똥강아지가 되었는가”로 제목을 바꿔도 무방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보는 내내 웃고 말았다. 셰리 블레어가 갑자기 반들반들한 눈빛으로 여왕을 편드는 자기 남편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왕정의 수호자”라고 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진짜 노동당 출신 총리가 순식간에 “일주일만에 여왕에게 감복한 딸랑이”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납득할 만한 건 토니 블레어의 모친이 여왕과 비슷한 또래, 전쟁을 겪었고 보수적인 인물, 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인데, 영국 총리가 마더콤인 것과 노동당수가 여왕의 딸랑이가 되는 것 중 어느쪽이 나은 일인걸까.

여튼 이 영화에서 진지한 부분은 왕정의 위기, 이고 이 영화에서 메타포라고 부를만한 건 전부 이 문제에 할애되어 있다. 이전에 보았을 때도 언급했던, 왕관을 쓴 듯이 아름다운 뿔을 지닌 사슴이 런던에서 온 은행가(자본주의자이자 귀족이 아닌 신흥세력)에게 사냥당해 상처입고 목이 잘려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은. 여왕이 다이애나에게 건네지 못했던 애도를 사슴에게 건네는 장면 이후, 인파 가득한 버킹엄 궁 앞으로 여왕의 차가 들어오는 장면은 꼭, 바렌에서 도주하다 붙잡힌 루이 16세 일가가 잡혀오는 그림같은 구도였다는 느낌이 새삼 들었고.

그나저나 Duty first, Self second 같은 소리를 막판에 하려면 앞부분에서 필립공이, 바로 하루이틀 전에 어머니를 잃은 열살 남짓한 손자들을 데리고 사냥이나 가는 장면들이 없었어야 설득력이 있지. 지금 보니 진짜 이거 엉망진창인 이야기 막판에 무슨무슨 도련님, 무슨 도쿠가와 가문 후계자, 그런 사람이 인롱을 딱 들이밀며 지배하는 자에게는 지배하는 자의 뭐가 있는 법이라는 둥 한마디 하면 사방에서 “과연 XX님” “감복했습니다”하는 그런 거잖아. (비웃음)

하도 토니 블레어의 시각에서 처음에는 여왕과 왕실에 비판적이지만 점점 이해와 공감을 구하는 방향으로 극을 끌고 가는데다 토니 블레어가 마성의 여왕님에게 홀려 이성을 잃은 듯이 변하는 과정을 보며 난 이 영화가 데이비드 캐머런이 총리할 무렵에 나온 영화인가 했는데, 2006년이면 아직 노동당 집권기였다. 그것도 아직 토니 블레어 정권일 때. 뭐, 당사자가 총리일 때 저런게 나왔으면 그건 나름대로 괜찮지. ㅋㅋㅋㅋㅋㅋ 하지만 시기를 감안하고 보니까, 왕정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동당 지지자 입장에서 제3의 길을 선택하며 우편향한 총리를 비판하는 영화겠구나. (그러니까 블레어의 비서나 셰리 블레어 캐릭터에 이입해서 봐야 하는)

그래도 영화 속 토니 블레어의 장면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게 좀 있긴 있다. 이를테면 변호사인 셰리 블레어가 일하는 동안 토니 블레어가 설거지하는 장면 같은 것.

댓글

“더 퀸 (2023.7.9. 추가)” 에 하나의 답글

  1. Beans 아바타
    Beans

    안녕하세요 ^^ 저도 내일 오전에 조조로 이거 보러 가기로 했어요. 마침 제가 쓰고 있는 글이 현대물에 영국 왕실과 비스무리한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라 참고(?)도 할 겸…. 여왕님과 마님 페치이기도 하니까 즐겁게 볼 수 있겠네요 ㅠ (예전에 고등학생 때 다이애나 비가 죽었는데 그 때 한창 두 왕자들에 대한 소녀들의 모에♡도 심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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